영조의 탕평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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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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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절대왕정과 계몽

유럽 대부분이 절대군주의 궁정 정치로 움직였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전쟁이 반복됐고, 그 아래 살롱과 백과전서에서 왕권을 의심하는 사상이 자랐다.

한반도

조선 후기

세도정치와 삼정 문란이 겹쳤다. 서양 선박이 연안에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문을 닫아걸었다.

전쟁

해당 없음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5명

바흐예술1723 · 「마태 수난곡」의 작곡가, 음악의 아버지
1685 – 1750

라이프치히 교회의 음악 감독으로 매주 칸타타를 썼다. 살아서는 오르간 연주자로 유명했고 죽은 뒤 백 년 만에 「음악의 아버지」가 됐다.

  • 「브란덴부르크 협주곡」「평균율 클라비어」
  • 「마태 수난곡」(1727)
  • 「푸가의 기법」 — 대위법의 완성
오일러과학1736 · 수학자
1707 – 1783

역사상 가장 많은 논문을 쓴 수학자

  • 쾨니히스베르크 다리 문제 해결
  • 그래프 이론의 시작
  • 현대 수학 표기법 다수 고안
마리아 테레지아정치1745 · 16명의 자녀를 낳고 합스부르크를 지킨 여제
1717 – 1780, 재위 1740 – 1780

여자라는 이유로 유럽이 상속을 부정하자 헝가리 귀족 앞에 아기를 안고 나서 군대를 얻었다. 40년 동안 제국을 개혁했다.

  •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제국 수호
  • 의무교육·행정 개혁, 상비군 정비
  • 마리 앙투아네트 등 자녀 정략혼
오세이 투투정치1701 · 아샨티를 하나로 묶은 왕
1660?년 무렵 – 1717

흩어진 아칸족 도시들을 쿠마시를 중심으로 통합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황금 의자가 지금도 왕권의 상징이다.

  • 사제 오콤포 아녜에와 함께 아샨티 동맹 결성
  • 황금 의자(시카 드와)를 나라의 영혼으로 선포
  • 금 무역로를 장악해 아샨티를 서아프리카 강국으로
표트르 대제정치1700 · 러시아 차르
1672 – 1725

직접 서유럽에서 조선술을 배워왔다. 늪지에 새 수도를 세우고 바다로 나갔다.

  • 서유럽에서 직접 기술을 배워옴
  •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 대북방전쟁 승리

그 무렵의 사건

1725
영조의 탕평책
영조는 붕당 간 극심한 대립으로 정치가 마비되자,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숙종 때부터 격화된 붕당 간의 당쟁은 상대 당을 완전히 몰락시키는 환국 정치로까지 치달아 정치 기강이 크게 흔들렸다. 이 와중에 왕위에 오른 영조는 자신의 즉위 과정에서도 붕당의 다툼에 시달렸던 만큼,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각 붕당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국정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는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워 이 원칙을 널리 알리고, 붕당의 뿌리인 서원을 대거 정리하며 이조 전랑의 권한도 축소했다. 영조의 탕평책으로 극단적인 당쟁은 상당히 진정되었으며, 이 흐름은 손자인 정조에게로 이어져 조선 후기 정치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1701
아샨티 제국
1701년 오세이 투투가 세운 아샨티 제국은 금 무역으로 번영하며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 중 하나로 성장했으나, 19세기 말 영국과의 거듭된 전쟁 끝에 식민 지배 아래 놓였다.
건국자 오세이 투투는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황금 의자('황금 스툴')를 왕권의 상징으로 삼아 여러 부족을 하나의 연합체로 묶었다. 이 의자는 오늘날까지도 아샨티 왕권의 신성한 상징으로 여겨진다. 아샨티는 풍부한 금광과 노예무역으로 큰 부를 쌓았으나, 19세기 들어 이권을 노린 영국과 다섯 차례에 걸친 전쟁(영국-아샨티 전쟁)을 치렀다. 1900년 마지막 전쟁에서 패배하며 결국 영국의 보호령으로 편입됐다.
1750
균역법 시행
영조는 백성이 부담하던 군포를 절반으로 줄이는 균역법을 시행해 군역의 폐단을 완화했다.
조선의 양인 남성은 군역 대신 군포(베 2필)를 바쳐야 했는데, 군적이 문란해지면서 이미 죽은 사람이나 갓난아이에게까지 군포를 매기는 백골징포·황구첨정 같은 폐단이 만연했다. 영조는 1750년 균역법을 시행해 군포 부담을 종전의 절반인 1필로 줄였다. 이로 인해 줄어든 국가 재정은 지주에게 걷는 결작(토지에 매기는 세금)과 어업세·소금세 등 잡세로 메우도록 했다. 균역법은 백성의 부담을 다소 덜어주었지만 근본적인 군적 문란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해, 조선 후기까지 군포 관련 폐단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1755
리스본 대지진
만성절 아침 지진·쓰나미·화재가 리스본을 지웠다. 「신은 왜 허락했는가」가 계몽사상의 질문이 됐다.
11월 1일 미사 시간에 규모 8.5로 추정되는 지진이 덮쳤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강가로 피하자 쓰나미가 왔고 촛불이 도시를 닷새 동안 태웠다. 인구 20만 중 3만에서 5만이 죽었다. 재상 폼발은 「죽은 자를 묻고 산 자를 먹이라」며 격자형 내진 도시를 다시 세웠고, 볼테르는 「캉디드」로 낙관론을 비웃었다. 근대 지진학의 출발점이다.
1688
명예혁명
1688~89년, 잉글랜드 의회가 가톨릭 왕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그의 딸 메리와 사위 윌리엄을 공동 왕으로 앉혔다. 유혈 충돌 없이 이뤄졌다.
이듬해 권리장전이 제정되며 의회가 왕권 위에 있다는 원칙이 확립됐다.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정으로 넘어가는 결정적 전환점으로 꼽힌다.
1769
산업혁명
와트의 증기기관 특허와 아크라이트의 방적기가 같은 해에 나왔다. 기계가 사람의 손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석탄과 철이 풍부한 영국 중부에서 면직물 공장이 강가에서 도시로 옮겨 왔다. 증기기관이 방적기와 직조기를 돌리고 곧 철도를 끌었다. 인구가 농촌에서 맨체스터·버밍엄으로 몰렸고 아동 노동과 슬럼, 그리고 중산층이 함께 생겼다. 이 변화는 100년 안에 유럽과 미국, 일본으로 번져 인류의 생활수준을 처음으로 지속적으로 끌어올렸다.

교역로 2개

희망봉 항로1500 – 1900

바스쿠 다 가마 이후 400년.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아시아에 닿는 길이 열리며 베네치아와 오스만이 밀려났다.

오간 것후추와 면직물, 그리고 나중엔 차와 아편. 지중해를 거치지 않는 길이 베네치아와 오스만을 밀어냈다.
거점리스본 · 카나리아 · 희망봉 · 모잠비크 · 고아 · 말라카
대서양 삼각무역1600 – 1850

유럽의 공산품 → 아프리카의 노예 → 아메리카의 설탕·면화 → 유럽. 세 대륙이 하나의 경제로 묶였다.

오간 것유럽의 총기·직물 → 아프리카의 노예 → 아메리카의 설탕·면화. 1,200만 명이 대서양을 건넜다.
거점리버풀 · 리스본 · 기니만 · 카리브 · 버지니아

영조의 탕평책

사건 · 1725 · 탕평책

숙종 때부터 격화된 붕당 간의 당쟁은 상대 당을 완전히 몰락시키는 환국 정치로까지 치달아 정치 기강이 크게 흔들렸다. 이 와중에 왕위에 오른 영조는 자신의 즉위 과정에서도 붕당의 다툼에 시달렸던 만큼,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각 붕당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국정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는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워 이 원칙을 널리 알리고, 붕당의 뿌리인 서원을 대거 정리하며 이조 전랑의 권한도 축소했다. 영조의 탕평책으로 극단적인 당쟁은 상당히 진정되었으며, 이 흐름은 손자인 정조에게로 이어져 조선 후기 정치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숙종 때부터 격화된 붕당 간 당쟁은 반대파를 완전히 몰락시키는 환국 정치로까지 치달았고, 이 혼란 속에서 왕위에 오른 영조는 탕평책을 국정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영조 자신도 즉위 과정에서 붕당 간의 극심한 대립과 의심에 시달렸던 경험이 있었기에, 그는 어느 한쪽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각 붕당에서 고르게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책을 강하게 추진했다.

그는 탕평의 원칙을 널리 알리고자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웠고, 붕당의 근거지가 되어온 지방 서원을 대거 정리했다. 붕당 간 갈등의 불씨였던 이조 전랑의 인사 권한도 축소해 붕당 정치의 구조적 토대를 약화시켰다.

영조의 탕평책으로 극단으로 치닫던 당쟁은 상당히 진정되었다. 이 정책 기조는 손자 정조에게로 이어져, 두 왕이 다스린 약 76년간은 조선 후기 정치가 비교적 안정되었던 시기로 평가받는다.

지도에서 보기: 1715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아샨티 제국 균역법 시행 리스본 대지진 명예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