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투어 · 아무 곳이나 누르면 멈춤
지도에 표시
지도는 휠·더블클릭·드래그 · PgUp/PgDn은 스냅샷 이동
게이지를 Shift+드래그하면 10배 정밀 · 오른쪽 눈금은 인물·전쟁·사건이 있는 자리
틀린 데나 빠진 데를 알려주시면 확인하고 고칩니다.
이 브라우저에만 저장됩니다. 서버로 아무것도 보내지 않습니다.
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새 종교가 100년 만에 이베리아부터 인더스까지를 하나의 정치권으로 묶었다. 사산조는 사라지고 동로마는 영토의 절반을 잃었다.
고구려가 낙랑을 몰아내고 남하했다. 광개토대왕·장수왕 대에 최전성기를 맞았고 백제와 신라가 동맹으로 맞섰다.
왜신라가 백제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당과 손잡았다. 당은 고구려를 뒤에서 치려는 목적이 있었다.
결과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먼저, 8년 뒤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왜당이 백제와 고구려 땅에 도호부를 두고 신라까지 지배하려 하자, 신라가 약속이 깨졌다고 판단했다.
결과신라가 매소성·기벌포에서 당군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을 확보했다.
당으로 가던 길에 해골물을 마시고 돌아섰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는 깨달음이다. 이후 시장과 마을을 돌며 글 모르는 사람에게 불교를 전했다.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약속을 어긴 당을 다시 몰아냈다. 죽어서 용이 되어 바다를 지키겠다며 동해에 묻혔다.
당나라에 유학해 화엄 사상을 배우고 돌아와 신라에 화엄종을 열었다. 부석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을 세우며 불교 대중화에 힘썼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외손자이자 4대 칼리파 알리의 아들. 우마이야 칼리파 야지드 1세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저항하다 카르발라에서 소수의 지지자와 함께 전멸했다.
가야 왕족의 후손으로 신라군을 이끌어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황산벌에서 5천으로 신라 5만을 맞았다. 네 번 이기고 다섯 번째에 무너졌다. 떠나기 전 자기 가족을 죽였다고 전한다.
딸이 죽은 대야성 함락 뒤 고구려와 일본을 거쳐 당으로 갔다. 진골로서 처음 왕이 됐다.
후궁에서 시작해 황후가 되고 끝내 스스로 황제가 됐다. 나라 이름까지 주(周)로 바꿨다.
국법을 어기고 서역으로 나가 17년 만에 경전 657부를 싣고 돌아왔다. 그의 여행기는 인도 역사의 1급 사료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사건 · 671 · 바다를 다스린 나라
수마트라의 팔렘방을 중심으로 인도와 중국을 잇는 길목을 600년간 쥐었다. 당의 승려 의정이 이곳에 머물며 산스크리트를 배웠다. 성을 남기지 않아 오래 잊혔다가 20세기에 비문으로 확인됐다.
【그때 그 자리】 AD 671년이다. 중국 승려 의정이 인도로 가는 길에 들렀다.
수마트라의 팔렘방이다.
스리위자야라는 나라가 있었다.
의정이 적기를, 그곳에 승려 1,000명이 있고 인도와 같은 방식으로 공부한다고 했다.
「인도로 가려는 자는 여기서 1~2년 머물며 규칙을 배운 뒤 가는 것이 좋다」고 썼다.
【왜 그렇게 됐나】 말라카 해협을 쥐었다.
인도와 중국을 잇는 바닷길의 목이다.
계절풍이 바뀌기를 기다려야 했다. 몇 달을 머무는 항구가 필요했다.
스리위자야가 그 항구를 제공하고 통행을 관리했다.
따르지 않는 배는 해적으로 다뤘다.
「탈라소크라시(해양 국가)」의 사례로 꼽힌다. 넓은 영토가 아니라 항구와 바닷길을 지배하는 방식이다.
【어떻게 흘렀나】 유적이 거의 없다.
석조 건물을 짓지 않았다. 나무와 대나무로 지어 강가와 물 위에 살았다.
그래서 오래 존재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1918년 조르주 세데스가 중국 사서와 비문을 대조해 그 실체를 밝혔다.
「케두칸 부킷 비문」이 683년의 것이다. 옛 말레이어로 쓰인 가장 오래된 글이다.
왕이 원정을 나가 승리한 것을 적었다.
저주 비문도 남아 있다. 반역하는 자에게 내릴 벌을 길게 나열했다.
【그래서】 불교의 중심이었다.
인도와 중국 사이를 오가는 승려들이 머물렀다.
아티샤가 11세기에 이곳에 와서 12년을 배웠다. 그 뒤 티베트로 가서 불교를 되살린다.
근처 자와에 보로부두르가 세워졌다. 다만 그것은 사일렌드라 왕조의 것으로, 스리위자야와의 관계는 논쟁이 있다.
【남은 것】 11세기에 인도의 촐라 왕조가 해상 원정을 왔다.
1025년 라젠드라 1세가 스리위자야의 항구들을 쳤다. 인도가 동남아시아를 무력으로 친 드문 사례다.
그 뒤 회복하지 못했다.
13세기에 자와의 싱하사리와 마자파힛에게 밀렸다.
15세기에 말라카가 그 자리를 이어받는다.
인도네시아가 독립하며 스리위자야를 국가 정체성의 뿌리 가운데 하나로 삼았다.
「누산타라」라는 관념이 마자파힛에서 왔다면, 「해양 국가」라는 관념은 스리위자야에서 온다.
지금 인도네시아 해군의 이름과 훈장에 그 이름이 쓰인다.
지도에서 보기: 6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신라의 삼국통일 우마이야 칼리파국 성립 신문왕의 왕권 강화 발해 건국 스리위자야의 번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