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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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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조산운동

생물과 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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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봉건 유럽과 십자군

교황과 황제가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다퉜다. 성지 회복을 내건 원정이 시작되며 유럽이 처음으로 바깥을 향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한반도

고려 전기

호족 연합으로 선 왕조가 과거제와 관료제로 중앙집권을 다졌다. 거란·여진과 부딪히며 북방 경계를 지켰다.

전쟁 1건

바이킹 시대793 – 1066
노르드인 vs 유럽 각지

인구 압력과 흘수 얕은 롱십이 결합했다. 강을 거슬러 내륙까지 들이닥칠 수 있는 배가 결정적이었다.

린디스판 약탈 793파리 포위 885스탬퍼드 브리지 1066

결과약탈로 시작해 정착과 건국으로 끝났다. 노르망디·러시아·아이슬란드가 이들의 손에서 생겼고, 북아메리카에도 콜럼버스보다 500년 먼저 닿았다.

273년 · 유럽 지도를 다시 그렸다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4명

정복왕 윌리엄장군1066 · 하루 만에 나라를 바꾼 사람
AD 1028 – AD 1087

노르망디 공의 사생아로 태어나 잉글랜드 왕이 됐다. 헤이스팅스 한 번의 전투가 잉글랜드의 지배층과 언어를 통째로 갈았다.

  • 헤이스팅스 전투 1066
  • 둠즈데이 북 — 전국 토지를 조사
  • 잉글랜드에 노르만 봉건제를 이식
왕안석정치1069 · 송을 뜯어고치려 한 재상
AD 1021 – AD 1086

재정난과 군사력 약화를 제도로 풀려 했다. 개혁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그가 물러나자 대부분 폐지됐다.

  • 청묘법 — 농민에게 낮은 이자로 빌려줌
  • 모역법·보갑법 등 신법 시행
  • 구법당과의 당쟁이 송을 갈랐다
야로슬라프정치1036 · 루스에 법을 세운 대공
978 무렵 – 1054

키예프 루스의 전성기다. 성 소피아 성당을 짓고 도서관을 두었으며 최초의 성문법 루스카야 프라우다를 정리했다.

  • 루스카야 프라우다 — 첫 성문법
  • 키예프 성 소피아
  • 딸들을 유럽 왕가에 시집보내 유럽의 장인이라 불렸다
소식예술1080 · 귀양지에서 더 좋은 글을 쓴 사람
AD 1037 – AD 1101

신법을 비판하다 여러 번 유배됐다. 시·산문·글씨·그림에 모두 능했고, 황주 유배 시절의 「적벽부」가 대표작이다.

  • 「적벽부」 — 유배지에서 쓴 절정
  • 송대 문인화의 기틀
  • 동파육 — 유배지의 요리가 이름을 남김

그 무렵의 사건

1054
동서 교회 분열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서로를 파문했다.
1,000년을 함께한 교회가 갈라졌다. 지금까지 봉합되지 않았다.
1050
카호키아
미시시피강 가에 인구 2만의 도시가 있었다.
북아메리카에 유럽인이 오기 전 가장 큰 도시였다. 밑변이 기자 대피라미드보다 넓은 흙 둔덕을 쌓았고, 나무 기둥을 원으로 세워 해를 관측했다. 13세기에 버려졌는데 이유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1077
카노사의 굴욕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눈 속에서 사흘을 맨발로 서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사죄했다.
주교를 누가 임명하느냐는 서임권 다툼에서 교황은 황제를 파문했고, 제후들이 황제를 버리려 하자 하인리히는 알프스를 넘어 카노사 성 앞에 섰다. 교황은 용서했지만 황제는 곧 힘을 회복해 로마로 쳐들어갔다. 이 사건은 교권이 왕권 위에 선 상징이자, 세속 권력과 교회가 갈라지는 서유럽 특유의 이중 구조를 굳힌 장면이다.
1030
촐라 왕조의 해상 원정
11세기, 남인도의 촐라 왕조가 벵골만을 건너 동남아시아의 스리위자야 왕국까지 해군을 보내 정복했다.
라자라자 1세와 그 아들 라젠드라 1세 시절 촐라는 인도양 해상무역로를 장악하는 강력한 해군력을 갖췄다. 동남아까지 원정을 보낸 것은 고대 인도 왕조로서는 이례적인 규모였다.
1019
강감찬과 귀주대첩
거란의 3차 침입 때, 강감찬은 귀주에서 거란 대군을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크게 무찔렀다.
거란은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하며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했다. 세 번째 침입 때 거란 장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개경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에 보급이 끊기고 지쳐 퇴각하게 됐다. 강감찬은 퇴각하는 거란군을 귀주에서 크게 무찔러, 살아 돌아간 병력이 수천에 불과할 정도로 궤멸시켰다(1019년). 이 승리로 거란은 이후 다시는 대규모로 고려를 침공하지 못했다.
1107
윤관의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국경을 위협하자, 윤관은 특수 부대 별무반을 창설해 이들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쌓았다.
여진족과의 첫 전투에서 고려의 기존 군대가 기병 중심인 여진족에 고전하자, 윤관은 기병·보병·승병을 아우르는 특수 부대 별무반을 조직해 재정비했다. 이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족을 북방으로 몰아낸 뒤, 그 자리에 9개의 성(동북 9성)을 쌓아 새 영토로 편입했다(1107년). 그러나 이 지역을 지키는 데 드는 비용과 여진의 거센 반환 요구 등을 고려해, 고려는 몇 년 뒤 이 땅을 여진에게 돌려주고 철수했다.

교역로 3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해상 실크로드100 – 1500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오간 것도자기와 차, 향신료와 향목. 배 한 척이 낙타 수천 마리 몫을 실었다.
거점광저우 · 참파 · 말라카 · 스리랑카 · 캘리컷 · 호르무즈 · 바스라

동서 교회 분열

사건 · 1054 ·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서로를 파문했다.

1,000년을 함께한 교회가 갈라졌다. 지금까지 봉합되지 않았다.

【그때 그 자리】

초기 기독교에는 다섯 개의 총대주교좌가 있었다.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이다.

7세기 이슬람 세력이 뒤의 셋을 차지했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만 남았다.

둘은 조건이 달랐다.

동쪽은 황제가 있었다. 총대주교는 황제 곁에 있었고 황제가 교회 일에 개입했다. 콘스탄티누스 이래의 전통이다.

서쪽은 황제가 없었다. 게르만 왕국들 사이에서 교황이 홀로 남은 로마의 권위였다. 그래서 세속 권력에서 독립적이려 했다.

언어도 갈렸다. 동쪽은 그리스어, 서쪽은 라틴어였다. 서로의 글을 읽지 못하게 됐다.

【왜 그렇게 됐나】

쟁점이 여럿 쌓였다.

하나는 교황의 권한이다. 서쪽은 로마 주교가 다른 총대주교보다 위라고 봤다. 동쪽은 동등한 다섯 중 첫째일 뿐이라고 봤다.

다른 하나가 필리오케다. 니케아 신경에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온다는 구절이 있는데, 서방이 아들에게서도라는 말을 덧붙였다. 동방은 공의회가 정한 문구를 한쪽이 마음대로 고쳤다고 봤다.

그 밖에도 있었다. 성찬에 누룩 든 빵을 쓸 것인가 무교병을 쓸 것인가, 사제의 결혼을 허용할 것인가, 성상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이 차이들이 신학보다 관할권 다툼과 얽혔다. 불가리아와 남부 이탈리아를 누가 관할하느냐가 실제 쟁점이었다.

【어떻게 흘렀나】

1054년 교황 레오 9세가 훔베르트 추기경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로 보냈다.

협상은 처음부터 어그러졌다. 훔베르트는 오만했고 총대주교 케룰라리오스는 완강했다.

7월 16일 훔베르트가 하기아 소피아 제단에 파문 문서를 올려놓고 나갔다. 며칠 뒤 총대주교가 맞파문했다.

그런데 이때 교황 레오 9세는 이미 석 달 전에 죽어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사절의 권한이 소멸한 상태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이 최종적인 분열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앞서도 여러 차례 파문과 화해가 있었다.

【그래서】

돌이킬 수 없게 만든 것은 1054년이 아니라 1204년이다.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했다. 성당이 털리고 성물이 뜯겨 나갔다. 하기아 소피아 제단에 창녀를 앉혔다는 기록이 있다. 라틴 제국이 세워져 57년간 이 도시를 지배했다.

이 뒤로 동방에서 서방에 대한 감정이 굳었다. 1453년 오스만의 위협 앞에서 서방의 도움을 받으려 교회 통합안이 논의됐을 때, 콘스탄티노폴리스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라틴인의 모자보다 튀르크인의 터번이 낫다.

【남은 것】

지금 가톨릭 신자가 13억, 정교회 신자가 2억 5천만 안팎이다.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와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가 1054년의 파문을 서로 철회했다. 911년 만이다.

2001년 요한 바오로 2세가 4차 십자군의 약탈에 대해 사과했다.

한 조직이 갈라지는 데는 대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오래 쌓인 조건이 있다. 그리고 갈라진 뒤에 벌어진 일이 그 분열을 굳힌다.

지도에서 보기: 10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카호키아 카노사의 굴욕 촐라 왕조의 해상 원정 강감찬과 귀주대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