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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산업화한 열강이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나눠 가졌다. 동맹 체제가 굳어지며 국지 분쟁이 전면전으로 번질 구조가 만들어졌다.
황제국을 선포하고 근대화를 시도했지만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잃었다.
왜300년 넘게 이어진 스페인의 식민 지배에 맞서 호세 리살 등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필리핀인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결과미국-스페인 전쟁이 겹치면서 스페인은 결국 필리핀을 미국에 넘겼는데, 필리핀인들은 스페인 대신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곧이어 필리핀-미국 전쟁을 벌이게 된다.
왜수단에서 일어난 마흐디 운동이 13년간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결과다섯 시간에 수단 쪽 1만이 죽고 영국 쪽 48명이 죽었다. 기관총이 전장에서 무엇을 하는지 처음으로 분명히 보인 날이다. 처칠이 스물셋에 여기 참전했다.
왜쿠바 독립전쟁에 미국 여론이 개입을 원했고, 아바나 항의 군함 메인호 폭발이 선전포고의 구실이 됐다.
결과「멋진 작은 전쟁」은 넉 달 만에 끝났다. 미국은 필리핀·괌·푸에르토리코를 얻고 쿠바를 보호국으로 삼아 태평양 제국이 됐다. 필리핀에서는 곧 독립군과의 새 전쟁이 시작됐다.
왜트란스발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영국계 이주민이 몰렸고, 영국이 이들의 참정권을 명분으로 보어 공화국을 압박했다.
결과영국이 남아프리카의 보어 공화국들을 병합했다.
왜미국-스페인 전쟁 뒤 미국이 필리핀을 매입하자, 이미 독립을 선포했던 필리핀 혁명 세력이 이에 맞섰다.
결과아기날도 등 독립 지도부가 붙잡히거나 항복하며 정규전은 끝났지만, 이후로도 저항이 이어졌다. 필리핀 민간인 사망자가 수십만 명에 달했다는 추산도 있다.
왜기독교 선교와 외세 침탈에 분노한 산둥의 비밀결사 「의화단」이 「부청멸양」을 외치며 교회와 철도를 부수자 서태후가 이를 이용해 열강에 선전포고했다.
결과55일 공사관 포위 끝에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서태후는 시안으로 달아났다. 청은 4억 5천만 냥의 배상금과 외국군 주둔을 받아들였고, 러시아는 만주를 점령해 러일전쟁의 씨앗이 됐다.
흑체복사 문제를 풀려고 에너지가 최소 단위로만 오간다고 가정했다. 그렇게 양자역학이 시작됐다.
꿈은 억압된 소원의 실현이고 사람은 스스로 모르는 힘에 이끌린다. 그의 이론은 심리학과 문학, 일상의 말까지 바꿨다.
헛간 실험실에서 광석을 정제해 새 원소를 분리했다. 서로 다른 두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유일한 사람.
어린 나이에 즉위해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세력 사이에서 통치했다. 을미사변 후 아관파천을 거쳐 대한제국을 선포했으나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강제 퇴위당했다.
1903년 12월 17일 키티호크 모래언덕에서 12초, 36m. 자전거 가게를 하던 두 형제가 하늘을 열었다.
이탈리아의 침공을 아드와에서 격퇴했다. 아프리카가 유럽 군대를 정면에서 이긴 드문 예이고, 그래서 에티오피아만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귀국해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조직, 자주독립과 근대 개혁을 이끄는 여론을 일으켰다.
넉 달 사이 논문 네 편으로 물리학을 바꿨다. 1919년 일식 관측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친러 정책으로 일본을 견제하려 하자, 조선 침탈에 방해가 된다고 본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해 그를 시해했다(을미사변).
아버지가 고부군수의 수탈에 항의하다 맞아 죽었다. 키가 작아 녹두장군이라 불렸다. 우금치에서 기관총 앞에 무너졌다.
역사는 나와 남의 싸움이라고 썼다. 을지문덕전을 써서, 우리에게도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일 자체가 힘이 된다고 봤다.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재판에서 동양평화론을 남겼다.
노예제를 없애고 관료제와 학교와 철도를 들였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땅 일부를 내주며 균형을 잡았다. 동남아시아에서 식민지가 되지 않은 유일한 나라다.
드비어스로 다이아몬드를 독점하고 케이프 식민지 총리가 됐으며 자기 이름을 딴 로디지아를 만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별도 병합하겠다」고 했다.
남부 농민들을 이끌고 빼앗긴 공유지를 되찾으려 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약속은 미뤄졌고 그는 끝내 타협하지 않았다. 매복에 걸려 죽었다.
원자핵을 발견하다
대륙이 움직인다고 말한 사람
에디슨의 직류에 맞서 교류 모터와 송전을 만들어 오늘의 전력망을 결정했다. 무선 전력의 꿈을 좇다 가난하게 죽었다.
삼민주의를 내걸고 열 번 봉기해 열 번 실패했지만 신해혁명으로 2천 년 제정을 끝냈다.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그를 국부로 받든다.
당장 싸우는 것보다 사람을 기르는 것이 먼저라고 봤다. 미국에서 동포를 조직하고 학교를 세웠다.
전자가 정해진 궤도만 돈다는 원자모형으로 양자역학의 문을 열었다.
모델 T를 조립라인에서 93분에 한 대씩 만들어 값을 세 배 낮췄다. 노동자에게 하루 5달러를 주어 자기 차를 사게 했다.
백조목 플라스크로 미생물이 병을 일으킨다는 것을 증명했다. 최초로 광견병 백신을 사람에게 썼다.
조슈의 하급 무사에서 4번 총리가 됐다. 대일본제국 헌법을 기초했고, 을사늑약을 강요한 뒤 하얼빈에서 안중근에게 저격당했다.
위에서 빠르게 바꾸려 했다. 일본의 힘을 빌린 것이 화근이었다. 사흘 만에 끝났고 10년 뒤 상하이에서 암살됐다.
제국을 무너뜨리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세웠다.
기독교 도덕을 「노예의 도덕」이라 불렀고 위버멘시와 영원회귀를 말했다. 44세에 광기에 빠졌고 그의 책은 20세기 사상을 뒤흔들었다.
결핵균과 콜레라균을 찾다
열일곱에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이끌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숨졌다.
3·1운동 뒤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광복군을 조직했다.
민족자결을 말해 3·1운동에 불을 붙였다. 국제연맹을 만들었으나 정작 미국 상원이 가입을 거부했다.
압전 효과를 발견하다
북로군정서를 이끌고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독립군 최대의 승리를 거뒀다. 이후 만주에서 무장 투쟁을 이어가다 암살당했다.
포수 출신으로 대한독립군을 조직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훗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1,093건의 특허. 멘로파크 연구소에서 발명을 산업으로 만들었고, 뉴욕에 세계 최초의 발전소를 세워 밤을 밝혔다.
「로마 진군」으로 권력을 잡은 첫 파시스트 독재자. 히틀러의 본보기이자 나중엔 그의 꼭두각시가 됐고, 파르티잔에게 처형돼 거꾸로 매달렸다.
제1차 세계대전 갈리폴리 전투의 영웅으로 명성을 얻은 뒤, 튀르크 독립전쟁을 이끌어 그리스와 연합국의 분할 시도를 막아냈다. 1923년 술탄정을 폐지하고 튀르키예 공화국을 세워 초대 대통령이 됐다.
18세에 즉위해 산업혁명과 제국 팽창의 시대를 살았다. 인도 여제가 됐고 유럽 왕실의 할머니가 됐다.
라코타족을 비롯한 여러 부족을 규합해 미군에 맞섰다. 1876년 리틀빅혼 전투에서 커스터 중령의 기병대를 전멸시켰으나, 결국 1890년 체포 과정에서 사살됐다.
3·1 운동 33인 가운데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몇 사람 중 하나다. 님의 침묵에서 님은 잃은 나라이기도 하고 부처이기도 하다.
전자를 파동으로 다루는 방정식을 세우고, 양자역학의 역설을 고양이 사고실험으로 짚었다.
바스쿠 다 가마 이후 400년.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아시아에 닿는 길이 열리며 베네치아와 오스만이 밀려났다.
사건 · 1900 · 울도군이 울릉전도·죽도·석도(독도)를 관할한다고 관보에 실었다. 일본의 시마네현 고시보다 5년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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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자리】
울릉도와 독도는 오래전부터 조선의 인식 안에 있었다. 512년 신라 이사부가 우산국을 복속시켰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는 우산과 무릉 두 섬이 서로 바라볼 만큼 가깝다고 적었다. 맑은 날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인다는 뜻이다.
조선은 15세기부터 울릉도에 사람을 살지 못하게 하는 쇄환 정책을 폈다. 왜구의 침입을 피하려는 조치였는데, 결과적으로 섬이 비어 일본 어민이 드나들었다.
1693년 안용복이 울릉도에서 일본 어민과 부딪쳐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는 거기서 두 섬이 조선 땅이라고 주장했고, 1696년 다시 건너가 항의했다. 이 일을 계기로 1696년 에도 막부가 일본인의 울릉도 도해를 금지했다.
1877년에는 일본 최고 행정기관인 태정관이 울릉도와 그 밖의 한 섬이 일본과 관계없다는 지령을 내렸다. 일본 정부 자신의 문서다.
【왜 그렇게 됐나】
19세기 후반 상황이 바뀌었다. 1882년 조선이 쇄환 정책을 거두고 울릉도에 사람이 살게 했다. 이주민이 늘었다.
동시에 일본인의 무단 벌목과 어로가 늘어 분쟁이 생겼다. 관리 체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커졌다.
【어떻게 흘렀나】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이 칙령 제41호를 반포했다. 사흘 뒤 관보에 실렸다.
내용은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승격시키고 도감을 군수로 고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2조에 군청의 위치와 관할 구역을 정했다.
울릉 전도와 죽도와 석도를 관할한다.
여기서 석도가 독도다. 근거는 이렇다. 당시 울릉도 주민 다수가 전라도 출신이었고, 그 지역 말로 돌을 독이라 했다. 돌섬이 독섬이 되고, 이를 한자로 적으면 뜻으로는 석도, 소리로는 독도가 된다. 실제로 1904년 일본 군함 니타카호의 항해일지에 한인들이 이 섬을 독도라 쓴다는 기록이 있다.
죽도는 울릉도 바로 옆의 작은 섬으로 지금도 같은 이름이다.
【그래서】
1905년 1월 일본이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로 이 섬을 자기 영토에 편입한다고 했다. 러일전쟁 중이었고, 이 섬에 망루를 세워 러시아 함대를 감시하려는 군사적 목적이 있었다.
이 고시는 현 단위 문서였고 관보에 실리지 않았다. 대한제국에 통보되지도 않았다. 이미 1904년 한일의정서로 외교가 사실상 묶여 있던 때다.
울도군수 심흥택이 이를 안 것은 1906년이다. 그는 본군 소속 독도가 일본 영지가 됐다고 하니 놀랍다는 보고를 올렸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를 부인하는 지령을 내렸다. 본군 소속이라는 표현이 1900년 칙령의 효력을 그대로 보여준다.
【남은 것】
1946년 연합군 최고사령부 지령 677호가 독도를 일본의 행정 범위에서 제외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문안에 이 섬이 명시되지 않아 지금도 해석 논쟁이 있다.
한국은 1954년부터 경비대를 두어 실효 지배하고 있다.
핵심은 시점이다. 대한제국이 1900년에 관보로 공표한 국가 문서가 있고, 일본의 편입은 그보다 5년 뒤에 현 단위 고시로 이뤄졌다. 그 5년 사이에 러일전쟁이 있었다.
이 지도에서 독도를 모든 시기에 한국 영토로 그리고 그 바다를 동해로 적은 근거가 여기 있다.
지도에서 보기: 19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사모아 분할 호주 연방 드레퓌스 사건 무술변법 대한제국 선포 파나마 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