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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바닷길을 열어 아메리카를 유럽 경제에 편입시켰다. 인쇄술이 종교개혁을 되돌릴 수 없게 만들었다.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새 왕조. 훈민정음과 측우기의 시대이자 사림과 훈구가 다투던 때다.
왜부유하고 분열된 이탈리아를 두고 프랑스와 합스부르크가 65년을 다퉜다.
결과화약·상비군·용병이 결합한 근대 전쟁의 실험장이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이 혼란 속에서 쓰였고,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이 전쟁으로 끝났다.
왜중앙아시아에서 밀려난 바부르가 카불을 거쳐 내려왔다. 병력은 1만 대 10만이었다.
결과수레를 사슬로 이어 방벽을 만들고 그 뒤에서 대포와 화승총을 쐈다. 코끼리가 총소리에 놀라 자기 군대를 밟았다. 화약이 인도의 판을 바꾼 날이고, 무굴 제국이 여기서 시작된다.
티무르와 칭기즈 칸의 피를 함께 받았다. 사마르칸트를 되찾으려다 실패하고 카불로 밀려났다가 인도로 내려갔다. 회고록을 직접 썼다.
덴마크가 주도하던 칼마르 동맹에 맞서 반란을 이끌었다. 1523년 스웨덴 왕으로 추대되며 근대 스웨덴 왕국의 시조가 됐다.
베오그라드와 로도스를 취하고 빈을 포위했다. 법전을 정비하고 이스탄불을 건축으로 채워 튀르크인은 그를 카누니(입법자)라 부른다.
에스파냐·네덜란드·오스트리아·나폴리·신대륙을 한 손에 쥐었다. 루터를 심문했고 프랑스와 오스만과 싸우다 지쳐 수도원으로 물러났다.
스물다섯에 아즈텍의 마지막 지도자가 되어 80일 포위를 버텼다. 금을 어디 숨겼느냐며 발을 불에 지지는 고문을 받았다. 지금 멕시코에서 저항의 상징이다.
수백 명의 병사와 원주민 동맹, 천연두로 테노치티틀란을 함락했다. 아즈텍은 무너지고 그 자리에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이 세워졌다.
형과 5년을 싸워 이긴 직후 168명의 에스파냐인에게 사로잡혔다. 몸값으로 방 하나를 금으로, 두 개를 은으로 채웠는데도 죽임을 당했다.
남아메리카 끝의 해협을 찾아 태평양에 이름을 붙였다. 필리핀에서 전사했으나 남은 배 한 척이 세비야로 돌아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했다.
인구 20만의 도시를 다스렸다. 당시 유럽 어느 도시보다 컸다. 에스파냐인을 궁에 들였다가 볼모가 됐고 성난 자기 백성이 던진 돌에 맞아 죽었다고 전한다.
168명으로 카하마르카에서 황제 아타우알파를 사로잡고 방 하나 가득한 금을 받은 뒤 죽였다. 쿠스코가 무너지고 리마가 세워졌다.
여섯 번 결혼하고 두 왕비를 처형했다. 교황이 이혼을 거부하자 스스로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됐다.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 인쇄술을 타고 2주 만에 독일 전역에 퍼졌다.
교회의 부패를 풍자하고 그리스어 신약을 펴냈다. 루터에게 길을 열었지만 분열은 거부했다.
군주는 사랑받기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낫다 — 피렌체 외교관이 실직 후 쓴 얇은 책이 근대 정치학의 출발이 됐다.
풀과 벌레를 그렸다. 당시 여성의 그림이 남은 것 자체가 드물다. 아들 이이를 길렀다는 것으로만 기억되는 것이 오래된 문제다.
조각가를 자처했으나 교황의 명으로 4년간 천장에 매달려 「천지창조」를 그렸고, 여든 넘어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설계했다.
예정설과 엄격한 교회 규율. 그의 가르침은 네덜란드·스코틀랜드·뉴잉글랜드로 퍼져 근대 서구의 정신을 만들었다.
폴란드의 성직자이자 천문학자였다. 죽는 해에야 책을 냈다. 지구가 도는 편이 계산이 훨씬 단순하다는 것이 그의 근거였다.
시신을 직접 해부해 갈레노스 이래 1,300년 된 오류를 바로잡았다.
카잔과 아스트라한을 정복하고 시베리아 진출을 시작했다. 동시에 친위 조직을 만들어 귀족을 학살했고, 화가 나 자기 아들을 때려 죽였다.
14세에 타브리즈를 점령하고 샤가 됐다. 12이맘 시아파를 강제해 수니파 이웃들과 갈라선 페르시아의 정체성이 여기서 나왔다.
바스쿠 다 가마 이후 400년.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아시아에 닿는 길이 열리며 베네치아와 오스만이 밀려났다.
사건 · 1526 · 1,250만 명을 아메리카로 실어 나른 삼각무역
포르투갈이 1526년 첫 직항 노예선을 아메리카로 보낸 뒤 약 350년간 이어졌다. 유럽에서 무기·직물을 아프리카로, 노예를 아메리카로, 설탕·면화를 다시 유럽으로 나르는 삼각무역의 한 축이었다. 항해 중 사망률이 10~15%에 달했다.
그때 그 자리: 1526년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직항하는 첫 노예선을 띄웠다. 이후 약 350년 동안 유럽 상인들은 무기와 직물을 아프리카로, 사람을 아메리카로, 설탕과 담배와 면화를 다시 유럽으로 실어 나르는 삼각무역을 이어갔다.
왜 그렇게 됐나: 아메리카의 사탕수수와 면화 농장은 값싸고 통제 가능한 대규모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원주민은 유럽 전염병으로 이미 인구가 급감한 상태였고, 유럽인 계약 노동자는 수가 부족했다. 서아프리카 해안의 일부 왕국과 상인들도 포로를 노예 상인에게 넘기며 무역에 가담했다.
어떻게 흘렀나: 아프리카 내륙에서 잡히거나 전쟁 포로가 된 사람들이 해안 요새(가나의 엘미나성 등)에 모였다가 배에 실렸다. 대서양을 건너는 중간 항로는 몇 주에서 몇 달이 걸렸고, 비좁고 비위생적인 환경 탓에 항해 중 사망률이 10에서 15퍼센트에 달했다.
18세기 후반부터 영국의 노예제 폐지 운동이 힘을 얻었다. 1807년 영국이 노예무역을, 1833년 노예제 자체를 금지했다. 미국은 1808년 노예 수입을 금지했지만 국내 노예제 자체는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나서야 폐지됐다.
그래서: 아메리카로 실려간 사람은 약 1,250만 명, 그중 살아서 도착한 사람은 약 1,07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 인구 이동은 아메리카 대륙, 특히 카리브해와 브라질의 인구 구성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남은 것: 노예무역과 노예제가 남긴 인종적 위계와 경제적 격차는 폐지 이후에도 오래 이어졌다. 미국의 짐 크로 법, 브라질과 카리브해의 인종 불평등이 그 직접적인 유산으로 꼽힌다. 정확한 사망자와 이송 인원 추산은 사료의 한계로 연구자마다 다르며, 지금도 계속 보정되고 있다.
지도에서 보기: 15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마자파힛 칼마르 동맹 마젤란의 세계일주 종교개혁 말라카가 넘어가다 중종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