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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미케네 궁전 문명이 무너진 뒤 문자도 왕궁도 사라졌다. 작은 촌락 단위로 흩어져 살았고 이 시기의 기록은 거의 남지 않았다.
청동기를 바탕으로 선 한반도 최초의 국가. 연·한과 부딪히며 요동에서 서북부에 걸친 세력을 유지했다.
왜봉건으로 나눠 준 제후들이 점차 왕실 말을 듣지 않았다. 서쪽 견융의 압박은 계속 커졌다.
결과유왕이 견융에게 죽고 왕실이 동쪽 낙읍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주 왕은 이름만 남고 춘추시대가 시작된다.
사울을 이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하나로 묶고 예루살렘을 도읍으로 삼았다. 시편의 상당수가 그의 것으로 전한다.
빛의 신 아후라 마즈다와 어둠의 세력이 싸우고 마지막 심판이 온다는 가르침은 유대교·기독교·이슬람의 종말론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해당 없음
사건 · BC 1000 · 어느 지파의 것도 아닌 도시
다윗이 여부스족의 성을 빼앗아 도읍으로 삼았다. 남북 지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지였다는 점이 선택의 이유로 꼽힌다. 3,000년 뒤에도 같은 이유로 다투는 땅이 됐다.
【그때 그 자리】 BC 10세기 무렵이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느슨하게 묶여 있었다.
다윗이 처음에는 남쪽 유다의 왕이었다. 헤브론에서 7년을 다스렸다.
북쪽 지파들까지 그를 왕으로 받아들이자, 수도를 옮겨야 했다.
【왜 그렇게 됐나】 헤브론은 유다의 도시다. 거기 그대로 있으면 북쪽이 승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북쪽 도시로 가면 유다가 반발한다.
예루살렘은 어느 지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여부스 사람들이 쥐고 있던 성이다.
그것을 쳐서 얻으면, 왕 개인의 것이 된다 — 「다윗 성」이라 불린 이유다.
지리도 맞았다. 남북의 경계에 있었고, 세 면이 골짜기라 방어에 유리했으며, 기혼 샘이 있어 물이 있었다.
【어떻게 흘렀나】 여부스인들이 「눈먼 자와 다리 저는 자도 너를 막을 수 있다」며 비웃었다고 사무엘하에 적혀 있다.
다윗의 부하 요압이 「물 긷는 통로(친노르)」로 올라가 성을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친노르」가 무엇인지 오래 논쟁이었다. 기혼 샘에서 성 안으로 이어지는 수직 갱도가 발견되면서 그것으로 보는 견해가 나왔는데, 연대가 맞지 않는다는 반론이 있다.
성을 얻은 뒤 언약궤를 옮겨 왔다. 다윗이 그 앞에서 춤을 췄다고 적혀 있다.
이것이 결정적이다. 정치의 중심과 신앙의 중심을 한 곳에 둔 것이다.
【그래서】 성전을 짓겠다고 했으나 예언자 나단이 막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사람이라는 이유다. 아들 솔로몬이 짓는다.
그 뒤 예루살렘은 유대교의 중심이 됐다. 성전이 두 번 무너지고도 그렇다.
【남은 것】 지금 그 도시가 세 종교의 성지다.
유대교는 성전 터의 서쪽 옹벽(통곡의 벽)에서 기도한다.
기독교는 예수가 처형되고 묻힌 자리에 성묘 교회를 두었다.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그곳에서 승천했다고 믿는다. 바위 돔과 알아크사 모스크가 성전 터 위에 있다.
한 언덕에 셋이 겹쳐 있다.
다윗이 그 성을 고른 이유는 단순했다. 어느 편도 아닌 땅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3,000년 뒤, 같은 이유로 그곳이 누구의 것도 되지 못하고 있다.
지도에서 보기: BC 10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고조선이 모습을 드러내다 노크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