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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제국이 동서로 갈라진 뒤 서쪽은 게르만 이동을 감당하지 못했다. 황제는 게르만 출신 장군의 허수아비가 됐고 속주가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고구려가 낙랑을 몰아내고 남하했다. 광개토대왕·장수왕 대에 최전성기를 맞았고 백제와 신라가 동맹으로 맞섰다.
해당 없음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겨 아버지가 만든 힘을 남쪽으로 돌렸다. 79년을 다스렸다.
로마군에 복무했던 고트족 지휘관이었다. 약속받은 땅과 봉급을 받지 못하자 로마로 향했다.
갈리아까지 밀고 들어와 로마를 떨게 했다. 그가 급사하자 훈 제국은 곧 흩어졌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사건 · 427 · 1만 명이 배우던 곳
교사 2천 명과 학생 1만 명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티베트·한국·동남아시아에서 유학이 왔다. 신라의 혜초도 인도를 다녀와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1197년 침입으로 불탔고 도서관이 몇 달을 탔다고 전한다.
【그때 그 자리】 AD 427년 무렵이다. 지금의 인도 비하르주다.
굽타 왕조의 후원으로 세워졌다.
붓다가 여러 번 머문 곳으로 전해지는 자리다.
【왜 그렇게 됐나】 승원이면서 학교였다.
불교 승원은 원래 공부하는 곳이다. 그것이 커져 종합 교육 기관이 됐다.
왕들이 마을의 세금을 떼어 주었다. 200개 마을의 수입이 운영비가 됐다는 기록이 있다.
가르친 것이 불교만이 아니었다.
논리학·문법·의학·수학·천문학·베다 철학을 함께 가르쳤다.
반대편 학파의 교리도 가르쳤다. 논쟁하려면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흘렀나】 중국 승려들이 기록을 남겼다.
현장이 7세기에 와서 5년을 머물렀다.
그가 적기를, 학승이 1만 명, 교사가 1,500명이었다.
입학이 어려웠다. 문 앞에서 시험을 봤다.
「열에 일고여덟은 답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했다.
도서관이 셋 있었다. 가장 큰 것이 「라트나사가라(보석의 바다)」로 9층이었다고 전한다.
의정도 뒤에 와서 10년을 머물렀다.
그가 승원의 일과와 규율을 자세히 적었다. 물시계로 시간을 알렸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 승려 혜초도 8세기에 인도를 다녀갔다.
【그래서】 여기서 나온 것이 있다.
나가르주나·아상가·바수반두 같은 이름이 나란다와 이어진다.
티베트 불교가 이곳의 계통을 이었다. 8세기에 산타락시타가 티베트로 가서 삼예 사원을 세웠다.
지금 티베트 불교가 스스로를 「나란다 전통」이라 부른다.
달라이 라마가 그 표현을 자주 쓴다.
【남은 것】 1193년 파괴됐다.
델리 술탄국의 장군 바크티아르 킬지가 이끈 군대였다.
페르시아 사료 「타바카트이 나시리」에 그 기록이 있다.
도서관이 몇 달을 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다만 그 대목은 뒤에 덧붙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지는 것과 시기가 겹친다. 그 원인이 이 파괴만은 아니다 — 힌두교의 흡수와 후원의 소멸이 함께 작용했다.
1861년 커닝엄이 유적을 확인했다.
2016년 세계유산이 됐다.
2014년 그 옆에 나란다 대학이 새로 문을 열었다. 800년 만이다.
지도에서 보기: 4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로마 약탈 반달족의 로마 약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