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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미국과 소련이 세계를 진영으로 나눴다. 직접 충돌 대신 대리전을 치렀고, 그 사이 식민지가 해체되며 신생 독립국이 쏟아졌다.
두 정부가 서고 전쟁을 치렀다. 남쪽은 권위주의 정권 아래 압축 성장을 했다.
왜일본 항복 뒤 호찌민이 독립을 선언했으나 프랑스가 식민지 회복을 위해 돌아왔다.
결과8년 게릴라전 끝에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이 항복했다. 제네바에서 베트남은 17도선으로 갈렸고, 미국이 프랑스의 자리를 이어받아 베트남전쟁이 된다.
왜분단이 굳어지고 두 정부가 서로를 유일 합법 정부라 주장했다. 소련과 중국의 동의를 얻은 북한이 남침했다.
결과3년 만에 분단선이 국경으로 굳어졌다. 지금도 정전 상태다.
왜케냐의 비옥한 고원 지대를 영국계 정착민들이 차지하면서, 땅을 잃은 키쿠유족을 중심으로 무장 저항 조직이 결성됐다.
결과영국은 대규모 강제수용소를 세워 키쿠유족 수십만 명을 억류하고 가혹하게 진압했다 — 이 과정에서의 학대는 2013년 영국 정부가 뒤늦게 배상금을 지급하며 일부 인정했다.
왜프랑스는 알제리를 식민지가 아니라 본토의 일부(3개 도)로 취급했다. 130년 가까운 프랑스 지배와 정착민 우대 정책에 대한 반발이 무장투쟁으로 이어졌다.
결과양측 모두 고문·테러를 포함한 잔혹한 전술을 썼다. 프랑스군 승리에 가까웠지만 국내외 여론이 등을 돌리며 드골이 협상으로 전환했다.
왜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차이나를 다시 지배하려던 프랑스에 맞서 베트민이 8년째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결과프랑스는 산악 분지에 요새를 세워 베트민을 유인하려 했지만, 보응우옌잡 장군이 중화기를 산 위로 끌어올려 요새를 포위 공격했다. 두 달 가까운 포위 끝에 프랑스 수비대가 항복했다.
왜제네바 협정이 약속한 통일 선거가 무산되며 분단이 굳어졌다. 도미노 이론을 믿은 미국이 개입을 키웠다.
결과냉전이 실제 전쟁으로 터진 자리. 20년을 끌었다.
왜이집트 대통령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운하 지분을 갖고 있던 영국·프랑스가 이스라엘과 짜고 이집트를 공격했다.
결과군사적으로는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이 우세했지만, 미국과 소련이 동시에 철군을 요구하며 압박하자 세 나라는 굴욕적으로 철수해야 했다.
26년간 총리로 마오의 그늘에서 나라를 굴렸다. 제네바와 반둥에서 신중국을 세계에 소개했고 닉슨을 맞았으며 문화대혁명의 피해를 줄이려 애썼다.
DNA 이중나선을 밝히다
생명의 중심원리를 제시하다
51번 사진을 찍은 사람
1952년 군주정을 무너뜨린 자유장교단의 일원으로 권력을 잡았다. 1956년 수에즈 운하 국유화로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의 침공을 받았지만 외교적으로 승리하며 아랍 세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제20차 당대회 비밀 연설로 스탈린 숭배를 깼다. 스푸트니크를 쏘고 유엔에서 구두를 두드렸으며 쿠바 위기 뒤 실각했다.
영국령 골드코스트를 이끌어 가나로 독립시켰다. 범아프리카주의를 내걸었으나 1966년 외유 중 쿠데타로 쫓겨났다.
인천에 상륙해 전세를 뒤집었다. 이후 확전 문제로 해임됐다.
불가촉천민으로 나 미국과 영국에서 박사가 됐다. 독립 인도의 헌법 초안을 썼고 카스트에 의한 차별을 금지 조항으로 넣었다. 간디와 이 문제로 정면으로 부딪쳤다.
1958년 프랑스가 옛 아프리카 식민지들에 제안한 '프랑스 공동체' 잔류 국민투표에서, 기니만이 유일하게 거부표를 던지도록 이끌어 즉각 완전 독립을 얻어냈다. 이후 26년간 권위주의적으로 기니를 통치했다.
1940년 「프랑스는 전투에서 졌지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다」라고 방송했다. 알제리 전쟁의 혼란 속에 돌아와 대통령제 헌법을 만들었다.
만주 항일 유격대 출신으로 소련의 후원 아래 정권을 세웠다. 남침으로 300만이 죽는 전쟁을 일으켰고 3대 세습 체제의 시조가 됐다.
국공내전에서 이기고 톈안먼에서 건국을 선포했다.
바티스타 독재를 게릴라전으로 무너뜨리고 쿠바를 사회주의 국가로 선언했다. 미국의 코앞에서 반세기 가까이 권좌를 지켰다.
오토바이로 남미를 돌다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 혁명을 이끌었다. 장관직을 버리고 볼리비아 밀림에서 게릴라로 싸우다 처형됐다.
1959년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했다. 비폭력으로 티베트 자치를 호소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세계의 종교 지도자가 됐다.
정보이론을 세우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지낸 독립운동가로, 광복 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장기 집권을 시도하다 4·19혁명으로 하야했다.
파르티잔으로 나치를 몰아내고 소련 진영에서 이탈했다. 비동맹 운동을 이끌고 여섯 민족을 하나로 묶었으나 그가 죽자 나라도 갈라졌다.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에서 독립을 선언했고, 다음 날 아랍 5개국의 공격을 막아 냈다. 사막 키부츠에서 여생을 보냈다.
일본 점령기와 그 이후 영국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1947년 영국과 독립 협정을 맺어냈으나, 같은 해 정적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돼 독립(1948)을 직접 보지 못했다.
탕가니카(오늘날 탄자니아 본토) 독립을 이끌고 잔지바르와의 통합으로 탄자니아를 세운 초대 대통령. '우자마(공동체 정신)'를 내세운 독자적 아프리카 사회주의 노선으로 농촌 집단화를 추진했으나 경제적으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자정의 종이 울릴 때 인도는 자유로 깨어난다」. 17년간 총리로 세속주의·사회주의·비동맹의 인도를 세웠다.
힌두-무슬림 통합의 대사였던 변호사가 두 민족론으로 돌아섰다. 파키스탄 건국 1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
1961년 4월 12일 보스토크 1호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108분의 비행 뒤 「지구는 푸르다」고 말했고 세계의 영웅이 됐다.
노동자 계층의 폭넓은 지지를 바탕으로 대통령에 올라 산업화와 사회복지 확대를 추진했다. 부인 에바 페론('에비타')과 함께 포퓰리즘 정치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43세의 최연소 당선. 「국가가 무엇을 해 줄지 묻지 말고」로 시작했고, 달 착륙을 약속했으며, 댈러스에서 총에 맞았다.
파리에서 요리사로, 뉴욕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30년을 밖에서 지냈다. 1945년 독립선언문 첫머리에 미국 독립선언을 인용했다.
프로그램을 메모리에 저장하는 구조를 제시해 현대 컴퓨터의 틀을 잡았다.
일본 항복 이틀 뒤 자카르타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4년의 무력·외교전 끝에 네덜란드의 승인을 받아냈으나, 1965년 이후 수하르토에게 밀려났다.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고도성장을 이끌었으나, 유신헌법으로 장기 집권 체제를 구축했다가 부하의 총에 살해당했다.
그의 이름으로 중국과 태평양의 전쟁이 벌어졌다. 원폭 뒤 항복을 방송했고, 전범 재판을 피해 「상징」으로 남아 1989년까지 재위했다.
루스벨트가 급사해 82일 만에 대통령이 됐고 원폭 사용을 결정했다. 마셜 플랜과 나토, 한국전쟁 참전으로 냉전의 틀을 짰다.
버스 보이콧에서 워싱턴 행진까지 비폭력으로 인종 분리를 무너뜨렸다. 39세에 멤피스에서 암살됐다.
로스앨러모스에서 3년 만에 폭탄을 만들었고, 첫 폭발을 보며 「나는 죽음이 되었다」를 떠올렸다. 수소폭탄에 반대하다 보안 청문회로 몰락했다.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영국으로부터 잠비아의 독립을 이끌어내 1964년 초대 대통령이 됐다. 27년간 집권하며 '인간주의'를 내세운 독자적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했으나, 구리 가격 하락에 따른 경제난 속에 1991년 선거에서 패배해 평화적으로 물러났다.
1944년 6월 6일 「출발」 명령을 내렸다. 대통령으로는 한국전쟁을 끝내고 고속도로를 깔았으며 「군산복합체」를 경고했다.
숙청으로 권력을 굳히고 독소전쟁을 이겼다. 전후 동유럽을 진영에 편입시켰다.
봄브라는 장치로 독일군 암호를 풀어냈다. 컴퓨터 이론의 기초를 놓았지만 박해 속에 세상을 떠났다.
그림으로 양자를 계산하다
콩고 위기의 혼란 속에서 쿠데타로 권력을 잡아 나라 이름을 자이르로 바꾸는 등 32년간 개인 숭배에 가까운 독재를 펼쳤다. 냉전기 반공 노선 덕에 서방의 묵인을 받으며 막대한 부를 국외로 빼돌렸다.
말레이시아에서 쫓겨난 작은 섬을 31년간 이끌어 1인당 소득을 영국보다 높였다. 청렴하되 권위적인 「아시아적 가치」의 모델이 됐다.
최초의 원자로를 가동하다
네루의 딸로 1966년 총리에 올라 총 15년을 통치했다. 1975~77년 비상사태를 선포해 반대파를 탄압했고, 1984년 시크교 사원 무력 진압에 대한 보복으로 자신의 경호원에게 암살당했다.
독립운동을 이끌어 1966년 말라위 초대 대통령이 된 뒤, 종신 대통령을 자처하며 30년 가까이 일당독재 체제를 유지했다. 반대파에 대한 탄압이 심했지만, 1990년대 국내외 민주화 압력에 밀려 다당제를 도입하고 선거에서 패배해 물러났다.
대공황을 뉴딜로 넘기고 전쟁으로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들었다.
만주 명동촌에서 나 일본에서 옥사했다. 스물일곱이었다. 시집은 죽은 뒤에 나왔다.
프랑스가 무너진 뒤에도 항복을 거부했다. 라디오 연설로 국민을 버티게 했다.
1936년 공화정부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켜 3년간의 내전 끝에 승리했다. 1975년 죽을 때까지 스페인을 권위주의 체제로 통치했다.
1969년 무혈 쿠데타로 왕정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뒤, 독자적인 '제3세계 이론'을 내세우며 42년간 리비아를 통치했다. 한때 여러 테러조직을 지원해 국제적 고립을 자초했으나 2000년대 들어 서방과 관계를 개선하기도 했다.
빈의 낙방 화가에서 독일 총통이 됐다. 유럽을 전쟁으로 몰아넣고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했으며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자살했다.
1969년 7월 20일 「한 사람에게는 작은 걸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 6억 명이 TV로 지켜봤다.
1970년 선거를 통해 라틴아메리카 최초로 합법적으로 집권한 마르크스주의 대통령이 됐다. 구리 광산 국유화 등 사회주의 개혁을 추진했으나 경제 혼란과 미국의 반대 속에 1973년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실각했다.
1970년 아버지를 무혈 궁정 쿠데타로 몰아내고 즉위한 뒤, 극도로 폐쇄적이던 오만을 도로·학교·병원을 갖춘 근대국가로 탈바꿈시켰다. 온건한 외교 노선으로 중동의 여러 갈등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71년 쿠데타로 집권한 뒤 8년간 우간다를 통치하며 반대파 수만~수십만 명을 학살했다. 기이한 언행과 과대망상적 자기칭호로도 악명이 높았으며, 국외로는 이스라엘·서방과 대립하는 노선을 취했다.
북벌로 중국을 통일했으나 일본과 공산당 사이에서 싸우다 1949년 대륙을 잃었다. 타이완에서 계엄으로 26년을 다스렸다.
「아비뇽의 처녀들」로 회화를 깨뜨렸고 「게르니카」로 폭격의 참상을 고발했다. 91년 동안 5만 점을 만들었다.
반공주의자가 베이징에 가서 마오쩌둥과 악수했다. 베트남에서 미군을 빼냈지만 도청 은폐로 사임한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 됐다.
무솔리니의 침공에 맞서 제네바에서 「오늘은 우리, 내일은 당신들」이라 경고했다. 44년을 다스렸고 라스타파리는 그를 신으로 섬긴다.
불황엔 정부가 돈을 써야 한다. 그의 「일반이론」은 전후 30년 서방 경제정책의 교과서였고 브레턴우즈 체제를 설계했다.
선거로 뽑힌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리고 17년을 통치했다. 자유시장 개혁과 함께 수천 명이 죽거나 사라졌다.
블랙홀도 빛을 낸다는 것을 밝히다
스물넷에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다. 이 한 번으로 장제스가 임시정부를 돕기 시작했다.
1902년 리야드를 탈환한 것을 시작으로 30년에 걸쳐 아라비아반도의 여러 부족과 도시국가를 정복·통합했다.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선포하고 초대 국왕이 됐다.
「0년」을 선언하고 도시를 비웠다. 4년 동안 인구의 4분의 1이 처형·기아·과로로 죽었다.
1977년 쿠데타로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를 축출하고 집권한 뒤, 이슬람법(샤리아)에 기반한 통치 체제를 강화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시기 미국의 핵심 우방으로서 아프간 무자헤딘 지원의 통로 역할을 했다.
소금 행진으로 비폭력 불복종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군 출신으로 쿠데타에 준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잡은 뒤, 개인숭배와 비밀경찰을 앞세운 폭압적 통치를 이어갔다. 아이티계 주민 수천~수만 명을 학살한 1937년 '파슬리 학살' 등으로 악명이 높았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세 번 숙청되고 세 번 돌아와 시장경제를 열었고, 톈안먼에서 학생들을 유혈 진압했다.
1973년 전쟁을 일으키고 1977년 예루살렘에 가서 연설했다.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시나이를 되찾고 노벨상을 받았으나 이슬람주의 장교에게 살해됐다.
은하가 서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관측으로 밝혀 팽창 우주를 증명했다.
팔레비 국왕의 세속화 정책을 비판하다 국외로 추방됐다. 15년의 망명 끝에 1979년 혁명으로 귀국해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하고 최고지도자가 됐다.
455년 만의 비이탈리아인 교황. 1979년 고국 방문이 연대노조를 낳았고 129개국을 순방했으며 유대인과 화해했다.
죽어 가는 이들의 집을 열어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들의 마지막을 지켰다.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2016년 성인이 됐다.
우연히 자란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발견했다.
백인 소수 정권에 맞선 독립운동 지도자로 1980년 짐바브웨 초대 총리(이후 대통령)가 됐다. 초기엔 화해와 재건을 내세웠지만 점차 권위주의로 흐르며 2000년대 강제 토지개혁과 경제 파탄, 반대파 탄압으로 국제적 비판을 받았다.
박정희 피살 뒤 군사 반란으로 권력을 잡고 광주를 유혈 진압했다. 7년 재임 뒤 6월 항쟁에 물러났고, 훗날 내란죄로 무기징역을 받았다.
해당 없음
사건 · 1954 · 1954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지원한 쿠데타로 토지개혁을 추진하던 과테말라의 민선 정부가 무너졌다.
아르벤스 정부가 미국 청과회사(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의 미개간 토지를 몰수해 재분배하려 하자, 이 회사의 로비를 받은 미국이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군사 쿠데타를 지원했다. 이후 과테말라는 수십 년에 걸친 군사정권과 내전(1960~1996)에 시달렸다.
1954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은밀히 계획하고 지원한 쿠데타로 과테말라의 민선 개혁 정부가 무너졌다.
1951년 집권한 하코보 아르벤스 대통령은 소수의 대지주와 외국 기업이 독점한 농지를 재분배하는 개혁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청과회사(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가 소유한 미개간 토지 상당 부분이 국유화 대상에 포함됐다.
이 회사는 미국 정부 고위 인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고, 냉전이 한창이던 당시 워싱턴은 이 개혁을 공산주의 확산의 신호로 받아들였다. CIA는 소규모 용병 부대와 심리전, 반군 지도자에 대한 지원을 조합해 아르벤스 정부를 무너뜨렸다.
쿠데타 이후 들어선 군사정권은 개혁을 모두 되돌렸고, 이는 이후 과테말라가 1996년까지 이어진 36년간의 내전에 빠져드는 시작점이 됐다. 이 사건은 냉전 시기 미국의 라틴아메리카 개입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지도에서 보기: 1945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에베레스트 초등 헝가리 혁명 모로코 독립 레니에 3세와 그레이스 켈리의 결혼 룩셈부르크와 유럽석탄철강공동체 가나 독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