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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소련이 해체되고 미국 단극 체제가 왔다. 유럽은 통합으로, 세계는 세계화로 갔지만 그 자리에 새로운 갈등이 들어섰다.
6월 항쟁으로 직선제를 얻었다. 외환위기를 겪고 세계 경제에 깊이 편입됐다.
왜1948년 정치 지도자 암살을 계기로 벌어진 '라 비올렌시아'(약 20만 명 희생)의 혼란 속에서 농민들이 자위 무장조직을 결성했는데, 이 중 일부가 이후 공산주의 게릴라 FARC로 발전했다.
결과게릴라가 마약 밀매로 자금을 조달하면서 전쟁은 이념 대립을 넘어 마약 전쟁의 성격까지 띠게 됐고, 이에 맞서 지주와 마약상들이 만든 우익 민병대까지 가세하며 반세기 넘게 여러 세력이 뒤엉킨 저강도 전쟁이 이어졌다.
왜포르투갈이 물러나자 세 독립운동 단체가 정권을 다퉜다. 소련·쿠바가 MPLA를, 미국·남아공이 UNITA를 도왔다.
결과냉전의 대리전이 냉전이 끝난 뒤에도 다이아몬드와 석유를 두고 10년을 더 갔다. 50만 명이 죽고 지뢰가 나라를 덮었다. 27년 만에 UNITA 지도자가 죽자 끝났다.
왜다수 신할라족과 소수 타밀족 사이의 오랜 차별 문제가 폭력 사태로 번지며, 타밀족 분리독립을 내건 무장단체 LTTE와의 내전이 시작됐다.
결과LTTE는 자살폭탄 테러를 널리 활용한 초기 무장단체 중 하나로도 알려져 있으며, 전쟁은 26년간 이어지며 수만 명의 민간인 희생을 낳았다.
왜소련 해체 과정에서, 아제르바이잔 영토 안에 있지만 주민 대다수가 아르메니아계인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이 아르메니아로의 편입을 요구하며 무력 충돌이 시작됐다.
결과전쟁 결과 아르메니아계 세력이 나고르노카라바흐뿐 아니라 주변 아제르바이잔 영토까지 장악했고, 양쪽에서 수십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이 갈등은 2020년 아제르바이잔이 튀르키예의 지원을 업고 벌인 2차 전쟁, 2023년 아제르바이잔의 전면 재점령으로까지 이어졌다.
왜독재자 새뮤얼 도의 통치에 반발한 찰스 테일러가 반군을 이끌고 봉기하며 두 차례에 걸친 내전이 시작됐다.
결과내전 과정에서 소년병 동원과 민간인 학살이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반군 지도자였던 찰스 테일러는 1997년 선거로 대통령이 됐으나, 이웃 시에라리온 내전에 개입해 반군을 지원한 혐의 등으로 훗날 국제전범재판에 회부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왜1991년 독재자 시아드 바레가 축출된 뒤 후계 권력을 놓고 여러 씨족 기반 군벌이 난립하며, 소말리아는 사실상 중앙정부가 없는 붕괴 상태에 빠졌다.
결과1993년 미군이 주도한 유엔 평화유지 작전이 모가디슈에서 현지 민병대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헬기 두 대가 격추되고 미군 18명이 전사하는 '블랙호크 다운' 사건이 벌어지자, 미국을 비롯한 서방은 급속히 개입에서 발을 뺐다. 이후로도 군벌 난립이 계속되다 2000년대 들어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조직 알샤바브가 세력을 넓혔다.
왜다이아몬드 광산 지대의 통제권을 노린 반군 조직 혁명연합전선이 이웃 라이베리아의 지원을 받아 봉기하며 내전이 시작됐다.
결과RUF는 다이아몬드를 밀매해 무기를 사들이는 이른바 '블러드 다이아몬드' 자금 구조로 악명이 높았고, 어린이를 강제로 납치해 소년병으로 부리거나 주민들의 손목을 잘라 공포를 조성하는 극단적 폭력으로도 국제적 충격을 안겼다.
왜소련 해체 직후, 지역·씨족 기반의 옛 공산당 기득권 세력과 이슬람 세력·민주화 세력이 연합한 반대 진영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지며 내전으로 번졌다.
결과옛 소련의 지원을 받은 정부군과, 아프가니스탄 접경 지역을 근거지로 한 반군 사이의 싸움으로 5만 명 이상이 희생됐다.
왜유고슬라비아 해체 속에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계가 반발했고 밀로셰비치의 지원을 받았다.
결과「인종 청소」라는 말이 이 전쟁에서 나왔다. 스레브레니차에서 유엔 안전지대의 무슬림 남성 8천 명이 살해됐다. 10만 명이 죽었고 데이턴 협정이 나라를 두 개의 자치체로 나눴다.
왜소련 해체 때 체첸이 독립을 선언하자 옐친이 무력 진압에 나섰고, 푸틴이 두 번째 전쟁으로 완전히 평정했다.
결과그로즈니는 두 번 완전히 파괴됐다. 수만 명이 죽었고 모스크바 극장·베슬란 학교 인질극 같은 테러가 이어졌다. 친러 카디로프 가문이 체첸을 다스리며 명목상 끝났다.
왜극심한 빈곤과 카스트·민족 차별에 시달리던 농촌 지역을 기반으로, 마오쩌둥주의를 내건 공산반군이 왕정 타도와 공화국 수립을 내걸고 무장봉기했다.
결과10년간의 내전으로 약 1만 7천 명이 숨진 끝에, 2006년 평화협정이 체결됐다. 이듬해 왕정이 공식 폐지되고 네팔은 공화국이 됐으며, 옛 반군 지도부는 이후 선거를 통해 합법적 정치 세력으로 전환했다.
왜세르비아가 알바니아계 다수 코소보의 자치를 없애자 무장 저항이 일었고 세르비아군의 학살이 이어졌다.
결과유엔 승인 없이 나토가 78일 동안 세르비아를 폭격했다. 코소보는 유엔 통치를 거쳐 2008년 독립을 선언했으나 세르비아와 러시아는 인정하지 않는다.
반군을 이끌고 라이베리아 내전을 촉발한 뒤 1997년 선거로 대통령이 됐다. 이웃 시에라리온 내전에 개입해 반군을 지원하고 다이아몬드 밀매에 관여한 혐의로, 퇴임 후 국제전범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최초의 전직 아프리카 국가원수가 됐다.
군 쿠데타 실패로 투옥됐다가 선거로 대통령에 올라, 막대한 석유 수익을 빈곤층 지원에 쏟아부으며 저소득층의 강한 지지를 받았다. 동시에 언론·사법부 장악과 반대파 탄압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인종분리 정책에 맞서다 종신형을 받고 27년을 갇혔다. 나와서 복수 대신 진실화해위원회를 세웠다. 가해자가 사실을 말하면 사면하는 방식이었다.
1994년 벨라루스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래 30년 넘게 집권하며 소련식 국가 통제 경제와 권위주의 통치를 이어왔다. 2020년 부정선거 의혹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강경 진압했고,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군에 자국 영토를 병참 거점으로 제공했다.
납치와 사형 선고를 넘긴 야당 지도자가 네 번째 도전 끝에 대통령이 됐다. IMF 위기를 넘기고 남북정상회담을 열었다.
아버지에게 권력을 물려받은 첫 공산 세습자. 대기근 속에 선군정치를 폈고 핵실험으로 세계와 맞섰다.
게릴라에서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오슬로 협정으로 자치정부를 세웠으나 평화는 오지 않았고 라말라 관저에 갇힌 채 죽었다.
최연소 의원에서 40년 야당 투사로 살았다. 하나회를 해체하고 금융실명제를 시행했으며, 임기 말 외환위기를 맞았다.
개혁과 개방을 밀어붙였고, 그 끝에서 소련이 해체됐다.
소련 해체로 독립한 투르크메니스탄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15년간 극단적인 개인숭배 체제를 구축했다. 스스로에게 '모든 투르크멘의 지도자'라는 뜻의 '투르크멘바시' 칭호를 붙이고,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달(月)·황금 동상을 전국 곳곳에 세웠다.
1991년 8월 탱크 위에서 연설해 보수파 쿠데타를 무너뜨렸고 넉 달 뒤 소련을 해체했다. 충격요법과 혼란, 그리고 푸틴에게의 승계로 끝났다.
CERN의 물리학자들이 문서를 나누게 하려고 HTML·HTTP·URL을 만들었다. 특허를 내지 않아 웹은 누구의 것도 아니게 됐다.
고졸 인권변호사가 대통령이 됐다. 탄핵을 이겨냈고 권위주의를 걷어냈으며, 퇴임 뒤 수사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란과 8년을 싸우고 쿠웨이트를 삼켰다가 미국에 쫓겨났다. 2003년 침공 뒤 땅굴에서 붙잡혀 교수형을 받았다.
쿠데타로 처형된 줄피카르 알리 부토 전 총리의 딸로, 1988년 이슬람권 국가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됐다. 부패 혐의로 두 차례 실각과 망명을 겪었으나 2007년 귀국해 재기를 노리던 중 선거 유세 도중 암살됐다.
12·12의 동지였으나 직선제를 받아들여 당선됐다. 서울올림픽을 치르고 소련·중국과 수교했으며 남북기본합의서를 맺었다.
차고에서 애플을 시작했고 쫓겨났다 돌아와 아이팟·아이폰·아이패드로 세계를 바꿨다. 「우주에 흔적을 남기자」고 했다.
「악의 제국」이라 부르며 군비를 늘리다 고르바초프와 핵을 줄였다. 감세와 규제 완화로 미국 보수의 상징이 됐다.
「담대한 희망」으로 당선됐다. 금융위기를 수습하고 건강보험을 개혁했으며 빈 라덴을 사살하고 이란·쿠바와 손을 잡았다.
1983년 쿠데타로 집권한 뒤 나라 이름을 '정직한 사람들의 땅'이라는 뜻의 부르키나파소로 바꾸고, 관료의 특권 폐지·여성 권리 신장·자립경제를 내세운 급진 개혁을 추진했다.
첫 여성 총리. 탄광 노조를 꺾고 국영기업을 팔았으며 포클랜드에서 이겼다. 사랑받거나 미움받았지 무시당하지 않았다.
부패와의 전쟁으로 정적을 제거하고 임기 제한을 없앴다. 일대일로와 미국과의 대결 속에 「중국몽」을 말한다.
백인 소수 정권에 맞선 독립운동 지도자로 1980년 짐바브웨 초대 총리(이후 대통령)가 됐다. 초기엔 화해와 재건을 내세웠지만 점차 권위주의로 흐르며 2000년대 강제 토지개혁과 경제 파탄, 반대파 탄압으로 국제적 비판을 받았다.
KGB 출신으로 1999년 권력을 넘겨받았다. 체첸을 짓밟고 올리가르히를 길들였으며 크림을 병합하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박정희 피살 뒤 군사 반란으로 권력을 잡고 광주를 유혈 진압했다. 7년 재임 뒤 6월 항쟁에 물러났고, 훗날 내란죄로 무기징역을 받았다.
팔레비 국왕의 세속화 정책을 비판하다 국외로 추방됐다. 15년의 망명 끝에 1979년 혁명으로 귀국해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하고 최고지도자가 됐다.
455년 만의 비이탈리아인 교황. 1979년 고국 방문이 연대노조를 낳았고 129개국을 순방했으며 유대인과 화해했다.
죽어 가는 이들의 집을 열어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들의 마지막을 지켰다.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2016년 성인이 됐다.
동독 출신 물리학자가 독일 첫 여성 총리가 됐다. 유로 위기와 난민 100만 명을 감당하며 「우리는 할 수 있다」고 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세 번 숙청되고 세 번 돌아와 시장경제를 열었고, 톈안먼에서 학생들을 유혈 진압했다.
1973년 전쟁을 일으키고 1977년 예루살렘에 가서 연설했다.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시나이를 되찾고 노벨상을 받았으나 이슬람주의 장교에게 살해됐다.
1977년 쿠데타로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를 축출하고 집권한 뒤, 이슬람법(샤리아)에 기반한 통치 체제를 강화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시기 미국의 핵심 우방으로서 아프간 무자헤딘 지원의 통로 역할을 했다.
「0년」을 선언하고 도시를 비웠다. 4년 동안 인구의 4분의 1이 처형·기아·과로로 죽었다.
27세에 권력을 이어받아 고모부와 형을 제거했다. 핵·미사일을 완성했다며 트럼프와 세 차례 만났으나 비핵화는 없었다.
블랙홀도 빛을 낸다는 것을 밝히다
선거로 뽑힌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리고 17년을 통치했다. 자유시장 개혁과 함께 수천 명이 죽거나 사라졌다.
반공주의자가 베이징에 가서 마오쩌둥과 악수했다. 베트남에서 미군을 빼냈지만 도청 은폐로 사임한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 됐다.
1971년 쿠데타로 집권한 뒤 8년간 우간다를 통치하며 반대파 수만~수십만 명을 학살했다. 기이한 언행과 과대망상적 자기칭호로도 악명이 높았으며, 국외로는 이스라엘·서방과 대립하는 노선을 취했다.
해당 없음
사건 · 1997 · 대기업의 잇단 부도와 외환 부족 사태로 국가 부도 위기에 몰린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1990년대 중반 한국 대기업들은 과도한 차입에 의존해 몸집을 불렸는데, 1997년 한보·기아 등 대기업이 잇달아 부도를 내면서 금융권의 부실이 한꺼번에 드러났다. 때마침 태국에서 시작된 동아시아 외환위기가 번지면서 외국 자본이 한꺼번에 빠져나갔고, 한국은 외환보유고가 바닥나 대외 채무를 갚을 외화조차 구하기 어려운 국가 부도 직전 상황에 몰렸다. 결국 정부는 그해 11월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신청했고, 그 대가로 강도 높은 기업·금융 구조조정과 대규모 정리해고를 수반하는 혹독한 개혁 프로그램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실업자가 급증했으며,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금 모으기 운동을 벌여 외채 상환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한국은 2001년 예정보다 3년 앞당겨 IMF 차입금을 조기 상환했지만, 이 위기는 이후 비정규직 확산과 양극화 심화 등 한국 사회에 깊은 후유증을 남겼다.
대기업의 잇단 부도와 외환 부족 사태로 국가 부도 위기에 몰린 한국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1990년대 중반 한국 대기업들은 과도한 차입에 의존해 몸집을 키웠는데, 1997년 한보에 이어 기아 등 대기업이 잇달아 부도를 내면서 이를 뒷받침해온 금융권의 부실이 한꺼번에 드러났다. 때마침 태국에서 시작된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여파가 한국으로도 번지면서 외국 자본이 급격히 빠져나갔다.
외환보유고가 바닥나 대외 채무를 갚을 외화조차 구하기 어려운 국가 부도 직전 상황에 몰린 정부는, 그해 11월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그 대가로 정부는 강도 높은 기업·금융 구조조정과 대규모 정리해고를 수반하는 혹독한 개혁 프로그램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실업자가 급증하는 등 국민들은 큰 고통을 겪었다. 국민들은 나라 빚을 갚는 데 보태겠다며 자발적으로 금 모으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한국은 예정보다 3년 앞당긴 2001년 IMF 차입금을 조기 상환했지만, 이 위기는 이후 비정규직 확산과 양극화 심화 등 한국 사회에 깊은 후유증을 남겼다.
지도에서 보기: 1994년의 세계 · 같은 시대: 홍콩 반환 탈레반의 첫 집권 금강산 관광 시작 동티모르 독립 르완다 대학살 루카셴코의 벨라루스 장기집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