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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독일·오스트리아·오스만·러시아 네 제국이 무너졌다. 전쟁이 끝나며 유럽 동부에 신생국이 줄지어 생겼다.
국권을 잃고 35년. 3·1운동과 임시정부, 만주의 무장 독립운동이 이어졌다.
왜35년 독재 아래 땅이 소수에게 몰렸다.
결과열 해 동안 100만 명 넘게 죽었다. 사파타도 비야도 끝을 보지 못했지만 1917년 헌법에 토지개혁과 노동권이 들어갔다. 20세기 첫 사회혁명으로 꼽힌다.
왜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되자 동맹 체제가 도미노처럼 작동했다. 발칸의 국지 분쟁이 6주 만에 대륙 전쟁이 됐다.
결과네 개 제국이 무너지고 유럽 지도가 통째로 다시 그려졌다.
왜러시아로 가는 바닷길을 열려고 다르다넬스로 상륙했다.
결과여덟 달 동안 양쪽에서 50만이 죽거나 다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물러났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이날을 자기 나라가 시작된 날로 기억하고, 터키는 케말이라는 이름을 여기서 얻었다.
왜1917년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았지만, 왕정파·자유주의자·다른 사회주의 세력이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영국·프랑스·미국·일본 등 외국군도 백군을 도와 개입했다.
결과적군이 트로츠키의 지휘 아래 조직력에서 앞서며 각지의 백군을 차례로 격파했다.
제국을 무너뜨리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세웠다.
당장 싸우는 것보다 사람을 기르는 것이 먼저라고 봤다. 미국에서 동포를 조직하고 학교를 세웠다.
전자가 정해진 궤도만 돈다는 원자모형으로 양자역학의 문을 열었다.
모델 T를 조립라인에서 93분에 한 대씩 만들어 값을 세 배 낮췄다. 노동자에게 하루 5달러를 주어 자기 차를 사게 했다.
대륙이 움직인다고 말한 사람
삼민주의를 내걸고 열 번 봉기해 열 번 실패했지만 신해혁명으로 2천 년 제정을 끝냈다.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그를 국부로 받든다.
열일곱에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이끌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숨졌다.
3·1운동 뒤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광복군을 조직했다.
남부 농민들을 이끌고 빼앗긴 공유지를 되찾으려 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약속은 미뤄졌고 그는 끝내 타협하지 않았다. 매복에 걸려 죽었다.
원자핵을 발견하다
민족자결을 말해 3·1운동에 불을 붙였다. 국제연맹을 만들었으나 정작 미국 상원이 가입을 거부했다.
북로군정서를 이끌고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독립군 최대의 승리를 거뒀다. 이후 만주에서 무장 투쟁을 이어가다 암살당했다.
포수 출신으로 대한독립군을 조직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훗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재판에서 동양평화론을 남겼다.
역사는 나와 남의 싸움이라고 썼다. 을지문덕전을 써서, 우리에게도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일 자체가 힘이 된다고 봤다.
「로마 진군」으로 권력을 잡은 첫 파시스트 독재자. 히틀러의 본보기이자 나중엔 그의 꼭두각시가 됐고, 파르티잔에게 처형돼 거꾸로 매달렸다.
제1차 세계대전 갈리폴리 전투의 영웅으로 명성을 얻은 뒤, 튀르크 독립전쟁을 이끌어 그리스와 연합국의 분할 시도를 막아냈다. 1923년 술탄정을 폐지하고 튀르키예 공화국을 세워 초대 대통령이 됐다.
넉 달 사이 논문 네 편으로 물리학을 바꿨다. 1919년 일식 관측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3·1 운동 33인 가운데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몇 사람 중 하나다. 님의 침묵에서 님은 잃은 나라이기도 하고 부처이기도 하다.
전자를 파동으로 다루는 방정식을 세우고, 양자역학의 역설을 고양이 사고실험으로 짚었다.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원리를 내놨다.
1903년 12월 17일 키티호크 모래언덕에서 12초, 36m. 자전거 가게를 하던 두 형제가 하늘을 열었다.
우연히 자란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발견했다.
은하가 서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관측으로 밝혀 팽창 우주를 증명했다.
소금 행진으로 비폭력 불복종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흑체복사 문제를 풀려고 에너지가 최소 단위로만 오간다고 가정했다. 그렇게 양자역학이 시작됐다.
군 출신으로 쿠데타에 준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잡은 뒤, 개인숭배와 비밀경찰을 앞세운 폭압적 통치를 이어갔다. 아이티계 주민 수천~수만 명을 학살한 1937년 '파슬리 학살' 등으로 악명이 높았다.
꿈은 억압된 소원의 실현이고 사람은 스스로 모르는 힘에 이끌린다. 그의 이론은 심리학과 문학, 일상의 말까지 바꿨다.
스물넷에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다. 이 한 번으로 장제스가 임시정부를 돕기 시작했다.
헛간 실험실에서 광석을 정제해 새 원소를 분리했다. 서로 다른 두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유일한 사람.
1902년 리야드를 탈환한 것을 시작으로 30년에 걸쳐 아라비아반도의 여러 부족과 도시국가를 정복·통합했다.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선포하고 초대 국왕이 됐다.
어린 나이에 즉위해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세력 사이에서 통치했다. 을미사변 후 아관파천을 거쳐 대한제국을 선포했으나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강제 퇴위당했다.
이탈리아의 침공을 아드와에서 격퇴했다. 아프리카가 유럽 군대를 정면에서 이긴 드문 예이고, 그래서 에티오피아만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귀국해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조직, 자주독립과 근대 개혁을 이끄는 여론을 일으켰다.
친러 정책으로 일본을 견제하려 하자, 조선 침탈에 방해가 된다고 본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해 그를 시해했다(을미사변).
아버지가 고부군수의 수탈에 항의하다 맞아 죽었다. 키가 작아 녹두장군이라 불렸다. 우금치에서 기관총 앞에 무너졌다.
무솔리니의 침공에 맞서 제네바에서 「오늘은 우리, 내일은 당신들」이라 경고했다. 44년을 다스렸고 라스타파리는 그를 신으로 섬긴다.
불황엔 정부가 돈을 써야 한다. 그의 「일반이론」은 전후 30년 서방 경제정책의 교과서였고 브레턴우즈 체제를 설계했다.
북벌로 중국을 통일했으나 일본과 공산당 사이에서 싸우다 1949년 대륙을 잃었다. 타이완에서 계엄으로 26년을 다스렸다.
「아비뇽의 처녀들」로 회화를 깨뜨렸고 「게르니카」로 폭격의 참상을 고발했다. 91년 동안 5만 점을 만들었다.
1936년 공화정부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켜 3년간의 내전 끝에 승리했다. 1975년 죽을 때까지 스페인을 권위주의 체제로 통치했다.
빈의 낙방 화가에서 독일 총통이 됐다. 유럽을 전쟁으로 몰아넣고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했으며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자살했다.
프랑스가 무너진 뒤에도 항복을 거부했다. 라디오 연설로 국민을 버티게 했다.
노예제를 없애고 관료제와 학교와 철도를 들였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땅 일부를 내주며 균형을 잡았다. 동남아시아에서 식민지가 되지 않은 유일한 나라다.
드비어스로 다이아몬드를 독점하고 케이프 식민지 총리가 됐으며 자기 이름을 딴 로디지아를 만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별도 병합하겠다」고 했다.
대공황을 뉴딜로 넘기고 전쟁으로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들었다.
만주 명동촌에서 나 일본에서 옥사했다. 스물일곱이었다. 시집은 죽은 뒤에 나왔다.
해당 없음
사건 · 1915 · 1915년, 오스만 제국이 자국 영토 안에 살던 아르메니아인을 대규모로 강제 이주·학살했다. 약 100만~15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된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만 제국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적국인 러시아와 내통할 것을 우려해, 이들을 시리아 사막 방향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죽음의 행진'을 명령했다. 행군 도중 굶주림과 질병, 학살로 대다수가 목숨을 잃었다. 오늘날 아르메니아를 비롯한 30여 개국은 이를 20세기 최초의 조직적 집단학살(제노사이드)로 공식 인정하고 있으나, 튀르키예 정부는 전쟁 중의 상호 피해였을 뿐 계획된 학살은 아니라며 이 규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1915년, 오스만 제국이 자국 영토 안에 오랫동안 거주해온 아르메니아인들을 대규모로 강제 이주시키고 학살했다. 최소 100만~15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이 시기, 오스만 제국 지도부는 기독교도인 아르메니아인들이 적국 러시아와 내통해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불안을 갖고 있었다. 이를 명분으로 오스만 정부는 아르메니아인 지식인과 지도층을 먼저 체포·처형한 뒤, 나머지 주민 대부분을 시리아 사막 방향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제대로 된 물자나 보호 없이 진행된 이 '죽음의 행진' 도중 굶주림과 탈수, 질병, 그리고 호송 병력과 무장 폭도의 습격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오늘날 아르메니아를 비롯해 프랑스·독일 등 30여 개국과 다수의 역사학자들은 이를 20세기 최초의 조직적 집단학살(제노사이드)로 공식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튀르키예 정부는 이를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양측 모두에게 피해가 발생한 사건으로 규정하며, 계획된 집단학살이라는 규정 자체를 지금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어 양국 관계의 첨예한 쟁점으로 남아 있다.
지도에서 보기: 1914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사라예보 사건 러시아 혁명 핀란드 독립 밸푸어 선언 타이타닉 침몰 스페인 독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