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위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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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억 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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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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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이슬람의 등장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새 종교가 100년 만에 이베리아부터 인더스까지를 하나의 정치권으로 묶었다. 사산조는 사라지고 동로마는 영토의 절반을 잃었다.

한반도

삼국의 각축

고구려가 낙랑을 몰아내고 남하했다. 광개토대왕·장수왕 대에 최전성기를 맞았고 백제와 신라가 동맹으로 맞섰다.

전쟁 2건

백제·고구려 멸망660 – 668
신라·당 연합 vs 백제·고구려

신라가 백제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당과 손잡았다. 당은 고구려를 뒤에서 치려는 목적이 있었다.

황산벌 660사비성 660평양성 668

결과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먼저, 8년 뒤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8년 · 두 왕조가 연달아 무너졌다
나당전쟁670 – 676
신라 vs 당

당이 백제와 고구려 땅에 도호부를 두고 신라까지 지배하려 하자, 신라가 약속이 깨졌다고 판단했다.

매소성 675기벌포 676

결과신라가 매소성·기벌포에서 당군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을 확보했다.

7년 · 대동강 이남을 지켜냈다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9명

원효사상668 · 신라의 승려
617 – 686

당으로 가던 길에 해골물을 마시고 돌아섰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는 깨달음이다. 이후 시장과 마을을 돌며 글 모르는 사람에게 불교를 전했다.

  • 대승기신론소 — 중국에서도 읽혔다
  • 화쟁 — 갈라진 학설을 아우름
  • 파계하고 설총을 낳았다
문무왕정치676 · 신라 30대 왕
626 – 681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약속을 어긴 당을 다시 몰아냈다. 죽어서 용이 되어 바다를 지키겠다며 동해에 묻혔다.

  • 668년 고구려 멸망
  • 675년 매소성·676년 기벌포에서 당을 격퇴
  • 대왕암 — 바다에 묻힌 왕
의상사상676 · 신라 화엄종을 연 승려
625 – 702

당나라에 유학해 화엄 사상을 배우고 돌아와 신라에 화엄종을 열었다. 부석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을 세우며 불교 대중화에 힘썼다.

  • 당 유학 후 화엄종 개창
  • 부석사 등 화엄십찰 건립
  • 「화엄일승법계도」 저술
후세인 이븐 알리사상680 · 카르발라에서 순교해 시아파의 정신적 중심이 된 인물
626 – 680

예언자 무함마드의 외손자이자 4대 칼리파 알리의 아들. 우마이야 칼리파 야지드 1세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저항하다 카르발라에서 소수의 지지자와 함께 전멸했다.

  • 카르발라 전투에서 순교(680)
  • 시아파에게 가장 중요한 추모일(아슈라)의 기원
  • 불의에 맞선 저항의 상징으로 기억됨
김유신장군660 · 신라 장군
595 – 673

가야 왕족의 후손으로 신라군을 이끌어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 황산벌에서 계백을 꺾음
  • 백제·고구려 정벌을 이끔
  • 나당전쟁에 대비한 군제 정비
계백장군660 · 백제의 마지막 장수
? – 660

황산벌에서 5천으로 신라 5만을 맞았다. 네 번 이기고 다섯 번째에 무너졌다. 떠나기 전 자기 가족을 죽였다고 전한다.

  • 황산벌 전투
  • 네 차례 격퇴 뒤 전사
  • 백제 멸망과 함께 죽었다
김춘추정치654 · 신라 29대 무열왕
603 – 661

딸이 죽은 대야성 함락 뒤 고구려와 일본을 거쳐 당으로 갔다. 진골로서 처음 왕이 됐다.

  • 648년 나당 동맹을 맺음
  • 진골 출신 첫 왕
  • 660년 백제 멸망을 봄
측천무후정치690 · 중국 유일의 여황제
AD 624 – AD 705

후궁에서 시작해 황후가 되고 끝내 스스로 황제가 됐다. 나라 이름까지 주(周)로 바꿨다.

  • 과거를 확대해 귀족 대신 실무 관료를 씀
  • 밀고 제도로 반대파를 숙청
  • 무자비 — 자기 비석을 글자 없이 세우게 함
현장사상645 ·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온 「서유기」의 삼장법사
602 – 664

국법을 어기고 서역으로 나가 17년 만에 경전 657부를 싣고 돌아왔다. 그의 여행기는 인도 역사의 1급 사료다.

  • 인도 나란다에서 유학(631–643)
  • 「대당서역기」 저술
  • 「반야심경」「유식」 경론 번역

그 무렵의 사건

671
스리위자야
말라카 해협을 쥔 바다의 나라.
수마트라의 팔렘방을 중심으로 인도와 중국을 잇는 길목을 600년간 쥐었다. 당의 승려 의정이 이곳에 머물며 산스크리트를 배웠다. 성을 남기지 않아 오래 잊혔다가 20세기에 비문으로 확인됐다.
676
신라의 삼국통일
당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을 확보했다. 한반도가 처음으로 하나의 정치권이 됐다.
한반도가 처음으로 하나의 정치권이 됐다. 다만 고구려 땅 대부분을 잃었다.
661
우마이야 칼리파국 성립
661년, 무아위야가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삼아 세습 칼리파국을 열었다. 이슬람 최초의 정통 칼리파 시대가 끝나고 왕조 체제로 바뀌었다.
4대 칼리파 알리가 암살된 뒤, 시리아 총독이던 무아위야가 권력을 장악했다. 이슬람 공동체 지도자를 합의로 뽑던 관행이 세습으로 바뀐 이 전환은 훗날 순니-시아 분열의 먼 배경이 됐다.
682
신문왕의 왕권 강화
삼국통일 직후 즉위한 신라 신문왕은 반란을 진압해 진골 귀족 세력을 억누르고, 국학을 세워 왕권 중심의 통치 체제를 확립했다.
신문왕은 즉위 직후 장인이자 유력 진골 귀족이던 김흠돌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 것을 계기로, 이에 연루된 귀족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귀족에게 지급하던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해 귀족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켰으며, 유교 경전을 가르치는 국립 교육기관 국학을 세워 왕에게 충성하는 관료를 길러냈다. 지방을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해 넓어진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릴 기반도 마련했다.
698
발해 건국
고구려 유민과 말갈이 만주에 세운 나라. 스스로 고구려를 잇는다고 밝혔다.
고구려 유민이 만주에 세운 나라. 스스로 고구려를 잇는다고 밝혔다.
700
스리위자야의 번성
땅이 아니라 바닷길을 지배해 부를 쌓은 나라였다.
수마트라 팔렘방을 중심으로 말라카 해협을 장악해 인도와 중국을 잇는 배들에게 통행세를 물렸다. 7세기 중국 승려 의정은 이곳에 승려 1천 명이 공부하는 불교 학문 중심지가 있다고 기록했다. 농사보다 무역에 기댄 「바다의 나라」였던 셈이다. 1025년 인도 남부의 촐라 왕조가 함대를 보내 왕도를 약탈했다 — 남아시아 해군력이 동남아시아까지 미친 드문 사례다. 이후 항구에 토사가 쌓이고 다른 항구들이 크며 서서히 저물었다.

교역로 4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해상 실크로드100 – 1500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오간 것도자기와 차, 향신료와 향목. 배 한 척이 낙타 수천 마리 몫을 실었다.
거점광저우 · 참파 · 말라카 · 스리랑카 · 캘리컷 · 호르무즈 · 바스라
인도양 계절풍 항로BC 100 – 700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오간 것로마의 금화가 인도로 흘러가고 후추가 로마로 왔다. 로마 원로원이 금 유출을 걱정할 정도였다.
거점미오스호르모스 · 아덴 · 소코트라 · 무지리스

스리위자야

사건 · 671 · 바다를 다스린 나라

수마트라의 팔렘방을 중심으로 인도와 중국을 잇는 길목을 600년간 쥐었다. 당의 승려 의정이 이곳에 머물며 산스크리트를 배웠다. 성을 남기지 않아 오래 잊혔다가 20세기에 비문으로 확인됐다.

【그때 그 자리】 AD 671년이다. 중국 승려 의정이 인도로 가는 길에 들렀다.

수마트라의 팔렘방이다.

스리위자야라는 나라가 있었다.

의정이 적기를, 그곳에 승려 1,000명이 있고 인도와 같은 방식으로 공부한다고 했다.

「인도로 가려는 자는 여기서 1~2년 머물며 규칙을 배운 뒤 가는 것이 좋다」고 썼다.

【왜 그렇게 됐나】 말라카 해협을 쥐었다.

인도와 중국을 잇는 바닷길의 목이다.

계절풍이 바뀌기를 기다려야 했다. 몇 달을 머무는 항구가 필요했다.

스리위자야가 그 항구를 제공하고 통행을 관리했다.

따르지 않는 배는 해적으로 다뤘다.

「탈라소크라시(해양 국가)」의 사례로 꼽힌다. 넓은 영토가 아니라 항구와 바닷길을 지배하는 방식이다.

【어떻게 흘렀나】 유적이 거의 없다.

석조 건물을 짓지 않았다. 나무와 대나무로 지어 강가와 물 위에 살았다.

그래서 오래 존재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1918년 조르주 세데스가 중국 사서와 비문을 대조해 그 실체를 밝혔다.

「케두칸 부킷 비문」이 683년의 것이다. 옛 말레이어로 쓰인 가장 오래된 글이다.

왕이 원정을 나가 승리한 것을 적었다.

저주 비문도 남아 있다. 반역하는 자에게 내릴 벌을 길게 나열했다.

【그래서】 불교의 중심이었다.

인도와 중국 사이를 오가는 승려들이 머물렀다.

아티샤가 11세기에 이곳에 와서 12년을 배웠다. 그 뒤 티베트로 가서 불교를 되살린다.

근처 자와에 보로부두르가 세워졌다. 다만 그것은 사일렌드라 왕조의 것으로, 스리위자야와의 관계는 논쟁이 있다.

【남은 것】 11세기에 인도의 촐라 왕조가 해상 원정을 왔다.

1025년 라젠드라 1세가 스리위자야의 항구들을 쳤다. 인도가 동남아시아를 무력으로 친 드문 사례다.

그 뒤 회복하지 못했다.

13세기에 자와의 싱하사리와 마자파힛에게 밀렸다.

15세기에 말라카가 그 자리를 이어받는다.

인도네시아가 독립하며 스리위자야를 국가 정체성의 뿌리 가운데 하나로 삼았다.

「누산타라」라는 관념이 마자파힛에서 왔다면, 「해양 국가」라는 관념은 스리위자야에서 온다.

지금 인도네시아 해군의 이름과 훈장에 그 이름이 쓰인다.

지도에서 보기: 6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신라의 삼국통일 우마이야 칼리파국 성립 신문왕의 왕권 강화 발해 건국 스리위자야의 번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