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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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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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고전기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을 제국으로 바꿨고 스파르타가 이를 꺾었다. 도시국가들이 서로를 소모시키는 사이 북쪽 변방의 마케도니아가 그리스 전체를 장악했다.

한반도

고조선

청동기를 바탕으로 선 한반도 최초의 국가. 연·한과 부딪히며 요동에서 서북부에 걸친 세력을 유지했다.

전쟁

해당 없음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3명

소크라테스사상BC 399 · 묻기만 하다 죽은 사람
BC 470 – BC 399

책을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광장에서 사람을 붙들고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을 뿐인데, 그 물음이 아테네를 불편하게 했다.

  • 문답법 — 답이 아니라 물음을 남김
  •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 독배를 들며 도망을 거부
히포크라테스과학BC 400 · 의학의 아버지
BC 460 무렵 – BC 370 무렵

질병을 신에게서 떼어놓다

  • 병을 자연적 원인으로 설명
  • 임상 관찰법을 체계화
  •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기원
플라톤사상BC 380 · 이데아를 말한 사람
BC 428 – BC 348

스승의 죽음을 보고 민주정에 회의를 품었다. 아카데미아를 세워 900년간 이어지는 학교를 만들었다.

  • 「국가」 — 철인이 다스려야 한다
  • 동굴의 비유 — 우리가 보는 것은 그림자
  • 아카데미아 설립 — 서양 최초의 대학

그 무렵의 사건

BC 399
소크라테스의 죽음
아테네가 철학자에게 독배를 내렸다.
제자 플라톤이 이 재판을 기록하며 서양 철학이 문서로 남기 시작했다.
BC 390
켈트족의 확산
갈리아의 켈트 전사 브렌누스가 로마를 약탈했다. 「패자에게 화 있으라」— 알프스 북쪽 유럽은 켈트의 땅이었다.
할슈타트와 라텐 문화로 알려진 켈트족은 BC 5세기부터 갈리아·브리타니아·이베리아·아나톨리아까지 퍼졌다. BC 390년 알리아에서 로마군을 깨고 도시를 점령해 금을 받고 물러났다. 저울에 칼을 던지며 한 말이 전한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과 로마화로 대륙의 켈트 언어는 사라졌고 아일랜드·웨일스·브르타뉴에만 남았다. 드루이드와 할로윈의 뿌리가 이들이다.

교역로 1개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소크라테스의 죽음

사건 · BC 399 · 아테네가 철학자에게 독배를 내렸다.

제자 플라톤이 이 재판을 기록하며 서양 철학이 문서로 남기 시작했다.

【그때 그 자리】

기원전 399년의 아테네는 상처투성이였다.

27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졌다. 역병으로 인구의 4분의 1이 죽었다. 성벽이 헐리고 함대를 넘겼다.

패전 뒤 스파르타가 세운 30인 참주가 8개월간 1,500명을 죽였다. 이들을 몰아내고 민주정이 회복됐지만 도시는 누구 탓인지 찾고 있었다.

【왜 그렇게 됐나】

고발장의 죄목은 두 가지였다. 나라가 믿는 신을 믿지 않고 새로운 신령을 들여왔다는 것, 그리고 청년을 타락시켰다는 것이다.

실제 이유는 정치적이었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30인 참주의 우두머리 크리티아스가 그의 제자였다. 아테네를 배신하고 스파르타로 넘어간 알키비아데스도 그렇다.

사면령이 있어 정치적 이유로는 처벌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죄목이 쓰였다는 것이다.

또 하나가 있다. 그는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물어 스스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드러나게 했다. 여러 사람 앞에서 그렇게 되면 원한이 남는다.

【어떻게 흘렀나】

시민 501명의 배심으로 재판이 열렸다. 유죄 280 대 무죄 221이었다.

당시 아테네 재판은 두 단계였다. 유죄가 나오면 원고와 피고가 각각 형량을 제안하고 배심원이 하나를 고른다.

원고가 사형을 제안했다. 그가 적당한 벌금이나 추방을 제안했다면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다르게 말했다. 자기가 평생 시민들에게 덕을 돌보라고 권했으니 받아야 할 것은 벌이 아니라 국가 유공자 대접, 곧 영빈관에서의 식사라고 했다.

배심원들이 더 화가 났다. 사형 표가 늘어 360 대 141이 됐다.

도망칠 수 있었다. 친구 크리톤이 준비를 마쳤고 간수도 매수돼 있었다.

그는 거부했다. 논리가 이랬다. 자기가 평생 법을 지키며 이 도시의 혜택을 받았는데, 판결이 불리하다고 법을 어긴다면 자기가 말해 온 것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독당근즙을 마셨다. 일흔이었다.

마지막 말이 남았다. 크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잊지 말고 갚아 주게.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술의 신이다. 병이 나은 사람이 바치는 제물이다. 삶이 병이었다는 뜻으로 읽는 해석이 오래됐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 재판을 보고 민주정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다수가 옳은 것은 아니라는 문제의식이 국가론으로 이어진다.

플라톤의 제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이고, 그의 제자가 알렉산드로스다.

【남은 것】

그는 한 줄도 쓰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그는 플라톤과 크세노폰이 쓴 것이다. 어디까지가 소크라테스이고 어디부터가 플라톤인지 지금도 논쟁이다.

이 재판은 민주정이 낳은 가장 유명한 처형이다. 다수결이 언제나 옳은가라는 물음의 가장 오래된 사례로 인용된다.

동시에 불복종의 원형으로도 인용된다. 다만 그는 법을 어기고 도망치지 않았다. 부당한 판결을 받아들이면서 그 부당함을 말로 남겼다.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한국에서 오래 퍼졌다. 그런 문장은 원전에 없다. 일제강점기 일본 법학 교재를 거쳐 들어온 것으로 밝혀졌다. 지금 교과서에서는 빠졌다.

지도에서 보기: BC 4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켈트족의 확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