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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교황과 황제가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다퉜다. 성지 회복을 내건 원정이 시작되며 유럽이 처음으로 바깥을 향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호족 연합으로 선 왕조가 과거제와 관료제로 중앙집권을 다졌다. 거란·여진과 부딪히며 북방 경계를 지켰다.
왜인구 압력과 흘수 얕은 롱십이 결합했다. 강을 거슬러 내륙까지 들이닥칠 수 있는 배가 결정적이었다.
결과약탈로 시작해 정착과 건국으로 끝났다. 노르망디·러시아·아이슬란드가 이들의 손에서 생겼고, 북아메리카에도 콜럼버스보다 500년 먼저 닿았다.
노르망디 공의 사생아로 태어나 잉글랜드 왕이 됐다. 헤이스팅스 한 번의 전투가 잉글랜드의 지배층과 언어를 통째로 갈았다.
재정난과 군사력 약화를 제도로 풀려 했다. 개혁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그가 물러나자 대부분 폐지됐다.
키예프 루스의 전성기다. 성 소피아 성당을 짓고 도서관을 두었으며 최초의 성문법 루스카야 프라우다를 정리했다.
신법을 비판하다 여러 번 유배됐다. 시·산문·글씨·그림에 모두 능했고, 황주 유배 시절의 「적벽부」가 대표작이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사건 · 1054 ·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서로를 파문했다.
1,000년을 함께한 교회가 갈라졌다. 지금까지 봉합되지 않았다.
【그때 그 자리】
초기 기독교에는 다섯 개의 총대주교좌가 있었다.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이다.
7세기 이슬람 세력이 뒤의 셋을 차지했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만 남았다.
둘은 조건이 달랐다.
동쪽은 황제가 있었다. 총대주교는 황제 곁에 있었고 황제가 교회 일에 개입했다. 콘스탄티누스 이래의 전통이다.
서쪽은 황제가 없었다. 게르만 왕국들 사이에서 교황이 홀로 남은 로마의 권위였다. 그래서 세속 권력에서 독립적이려 했다.
언어도 갈렸다. 동쪽은 그리스어, 서쪽은 라틴어였다. 서로의 글을 읽지 못하게 됐다.
【왜 그렇게 됐나】
쟁점이 여럿 쌓였다.
하나는 교황의 권한이다. 서쪽은 로마 주교가 다른 총대주교보다 위라고 봤다. 동쪽은 동등한 다섯 중 첫째일 뿐이라고 봤다.
다른 하나가 필리오케다. 니케아 신경에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온다는 구절이 있는데, 서방이 아들에게서도라는 말을 덧붙였다. 동방은 공의회가 정한 문구를 한쪽이 마음대로 고쳤다고 봤다.
그 밖에도 있었다. 성찬에 누룩 든 빵을 쓸 것인가 무교병을 쓸 것인가, 사제의 결혼을 허용할 것인가, 성상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이 차이들이 신학보다 관할권 다툼과 얽혔다. 불가리아와 남부 이탈리아를 누가 관할하느냐가 실제 쟁점이었다.
【어떻게 흘렀나】
1054년 교황 레오 9세가 훔베르트 추기경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로 보냈다.
협상은 처음부터 어그러졌다. 훔베르트는 오만했고 총대주교 케룰라리오스는 완강했다.
7월 16일 훔베르트가 하기아 소피아 제단에 파문 문서를 올려놓고 나갔다. 며칠 뒤 총대주교가 맞파문했다.
그런데 이때 교황 레오 9세는 이미 석 달 전에 죽어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사절의 권한이 소멸한 상태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이 최종적인 분열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앞서도 여러 차례 파문과 화해가 있었다.
【그래서】
돌이킬 수 없게 만든 것은 1054년이 아니라 1204년이다.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했다. 성당이 털리고 성물이 뜯겨 나갔다. 하기아 소피아 제단에 창녀를 앉혔다는 기록이 있다. 라틴 제국이 세워져 57년간 이 도시를 지배했다.
이 뒤로 동방에서 서방에 대한 감정이 굳었다. 1453년 오스만의 위협 앞에서 서방의 도움을 받으려 교회 통합안이 논의됐을 때, 콘스탄티노폴리스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라틴인의 모자보다 튀르크인의 터번이 낫다.
【남은 것】
지금 가톨릭 신자가 13억, 정교회 신자가 2억 5천만 안팎이다.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와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가 1054년의 파문을 서로 철회했다. 911년 만이다.
2001년 요한 바오로 2세가 4차 십자군의 약탈에 대해 사과했다.
한 조직이 갈라지는 데는 대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오래 쌓인 조건이 있다. 그리고 갈라진 뒤에 벌어진 일이 그 분열을 굳힌다.
지도에서 보기: 10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카호키아 카노사의 굴욕 촐라 왕조의 해상 원정 강감찬과 귀주대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