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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봉건 유럽과 십자군

교황과 황제가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다퉜다. 성지 회복을 내건 원정이 시작되며 유럽이 처음으로 바깥을 향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한반도

고려 전기

호족 연합으로 선 왕조가 과거제와 관료제로 중앙집권을 다졌다. 거란·여진과 부딪히며 북방 경계를 지켰다.

전쟁 1건

제1차 십자군1096 – 1099
십자군 vs 셀주크·파티마 칼리파국

동로마가 서방에 원군을 청했고, 교황이 성지 회복과 교회 통합을 내걸어 이를 대규모 원정으로 키웠다.

니케아 1097안티오키아 1098예루살렘 1099

결과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십자군 국가들을 세웠다. 지중해 동안에 200년간 라틴 세력이 남는다.

3년 · 예루살렘 함락 때 대규모 학살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4명

우르바노 2세사상1095 · 한 번의 연설로 200년을 움직인 교황
AD 1035 – AD 1099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성지 탈환을 호소했다.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는 외침이 군중에서 터져 나왔다고 전한다.

  • 클레르몽 연설 1095 — 십자군의 시작
  • 동서 교회 화해를 노렸으나 골만 깊어짐
  • 예루살렘 함락 소식을 듣지 못하고 사망
심괄과학1088 · 송의 과학자
1031 – 1095

몽계필담을 쓴 박학한 관료

  • 몽계필담 저술
  • 자기 편각을 처음 기록
  • 활자 인쇄술 관련 기록을 남김
소식예술1080 · 귀양지에서 더 좋은 글을 쓴 사람
AD 1037 – AD 1101

신법을 비판하다 여러 번 유배됐다. 시·산문·글씨·그림에 모두 능했고, 황주 유배 시절의 「적벽부」가 대표작이다.

  • 「적벽부」 — 유배지에서 쓴 절정
  • 송대 문인화의 기틀
  • 동파육 — 유배지의 요리가 이름을 남김
수리야바르만 2세정치1120 · 앙코르 와트를 지은 왕
1113 – 1150 재위

물을 다스려 일어선 나라의 절정이었다. 해자 한 변이 1.5킬로미터인 사원을 자기 무덤으로 지었다. 돌 500만 톤을 40킬로미터 밖에서 수로로 실어 왔다.

  • 앙코르 와트
  • 회랑 800미터에 새긴 힌두 신화
  • 크메르 최대 판도

그 무렵의 사건

1107
윤관의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국경을 위협하자, 윤관은 특수 부대 별무반을 창설해 이들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쌓았다.
여진족과의 첫 전투에서 고려의 기존 군대가 기병 중심인 여진족에 고전하자, 윤관은 기병·보병·승병을 아우르는 특수 부대 별무반을 조직해 재정비했다. 이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족을 북방으로 몰아낸 뒤, 그 자리에 9개의 성(동북 9성)을 쌓아 새 영토로 편입했다(1107년). 그러나 이 지역을 지키는 데 드는 비용과 여진의 거센 반환 요구 등을 고려해, 고려는 몇 년 뒤 이 땅을 여진에게 돌려주고 철수했다.
1113
앙코르의 물길
사람이 판 저수지 하나가 길이 8킬로미터였다.
우기에 넘치고 건기에 마르는 땅을 저수지와 수로로 다스렸다. 1년에 두세 번 벼를 거뒀고 그 잉여가 사원을 지었다. 도시 면적이 1,000제곱킬로미터로 산업화 이전 세계 최대였다는 평가가 있다. 15세기에 가뭄과 폭우가 번갈아 오며 그 수로가 무너졌다.
1077
카노사의 굴욕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눈 속에서 사흘을 맨발로 서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사죄했다.
주교를 누가 임명하느냐는 서임권 다툼에서 교황은 황제를 파문했고, 제후들이 황제를 버리려 하자 하인리히는 알프스를 넘어 카노사 성 앞에 섰다. 교황은 용서했지만 황제는 곧 힘을 회복해 로마로 쳐들어갔다. 이 사건은 교권이 왕권 위에 선 상징이자, 세속 권력과 교회가 갈라지는 서유럽 특유의 이중 구조를 굳힌 장면이다.
1126
이자겸의 난
고려 왕실과 겹사돈을 맺어 최고 권력을 누리던 외척 이자겸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됐다.
이자겸은 두 딸을 예종과 인종에게 각각 시집보내며 왕실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라는 이중의 위치로 권력을 독점했다. 인종이 그의 권력을 견제하려 하자, 이자겸은 척준경과 손잡고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불태우기까지 했다(1126년). 그러나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에 틈이 벌어지면서 결국 척준경이 이자겸을 배신해 제거했고, 반란은 진압됐다. 이 사건은 고려 중기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며 곧이어 벌어질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의 배경이 됐다.
1135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승려 묘청은 개경의 지덕이 다했다며 서경(평양)으로 수도를 옮기자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됐다.
이자겸의 난 이후 혼란한 정국에서, 묘청은 풍수지리를 내세워 개경 대신 서경으로 천도하면 나라가 다시 융성하고 금나라를 정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개경의 문벌 귀족들(김부식 등)이 이 주장에 강하게 반대해 천도가 무산되자, 묘청은 서경에서 '대위국'을 세우고 반란을 일으켰다(1135년).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이 1년 만에 반란을 진압했다. 이 사건은 자주적 대외 노선과 사대적 노선, 서경 세력과 개경 세력 사이의 대립을 보여준 사건으로 자주 거론된다.
1054
동서 교회 분열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서로를 파문했다.
1,000년을 함께한 교회가 갈라졌다. 지금까지 봉합되지 않았다.

교역로 3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해상 실크로드100 – 1500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오간 것도자기와 차, 향신료와 향목. 배 한 척이 낙타 수천 마리 몫을 실었다.
거점광저우 · 참파 · 말라카 · 스리랑카 · 캘리컷 · 호르무즈 · 바스라

팀북투

도시 · 1100 · 학자와 필사본의 도시였다

【그때 그 자리】

사하라 사막 남쪽 가장자리, 니제르강이 북쪽으로 크게 휘어지는 지점이다.

이 위치가 전부다. 사막을 건너온 낙타 대상과 강을 거슬러 온 배가 만나는 자리다.

오가는 물건이 정해져 있었다. 남쪽에서 금이 올라오고 북쪽에서 소금이 내려왔다.

소금이 왜 중요한가. 더운 지역에서 사람과 가축이 살려면 소금이 필요한데 서아프리카 내륙에는 나지 않는다. 사하라의 암염 광산에서 캔 소금판을 낙타에 실어 왔다. 한때 소금과 금을 같은 무게로 바꿨다는 기록이 있다.

【왜 그렇게 됐나】

11세기 무렵 유목민의 계절 야영지로 시작했다.

13세기 말리 제국이 이 지역을 아울렀다. 14세기 만사 무사가 절정을 만들었다.

1324년 그가 메카 순례를 떠났다. 수행원 6만 명에 금을 실은 낙타가 수백 마리였다고 전한다.

카이로를 지나며 금을 너무 많이 뿌려 그 지역 금값이 10년 넘게 회복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순례로 말리와 팀북투가 유럽에 알려졌다. 1375년 카탈루냐 지도에 금덩이를 든 만사 무사가 그려졌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학자와 건축가를 데려왔다. 진흙벽돌로 지은 징게레베르 모스크가 그때 세워졌다.

【어떻게 흘렀나】

15세기와 16세기 이 도시는 학문의 중심이 됐다.

상코레 모스크에 부속된 교육 기관에 학생이 2만 5천 명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당시 도시 인구가 10만 안팎이었다.

신학과 법학과 천문학과 수학과 의학을 가르쳤다.

책이 최대의 상품이었다. 한 기록에 이렇게 적혀 있다. 이곳에서는 어떤 상품보다 책이 큰 이익을 남긴다.

필사본이 대량으로 만들어지고 소장됐다. 개인 장서가 수천 권인 집안이 여럿이었다.

1591년 모로코가 침공했다. 화승총을 가진 군대 앞에 송가이 제국이 무너졌다. 학자들이 붙잡히거나 추방됐다.

이후 대서양 항로가 열려 서아프리카 무역의 중심이 해안으로 옮겨갔다. 사하라 종단로의 비중이 줄었다.

【그래서】

19세기 유럽인에게 팀북투는 전설이 됐다. 황금의 도시가 사막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었다.

1828년 프랑스인 르네 카이에가 들어갔다가 크게 실망했다. 진흙 집이 늘어선 가난한 마을이었다.

영어에서 팀북투가 아주 먼 곳을 뜻하는 관용어가 됐다. 실제 도시가 아니라 닿을 수 없는 곳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남은 것】

필사본은 남았다. 사람들이 집과 사막에 숨겨 지켰다.

지금까지 확인된 것이 30만 점 이상이다. 13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문서로, 아랍어와 현지어로 적혔다.

내용이 다양하다. 천문 관측 기록, 수학 문제, 법률 문서, 상거래 계약서, 여성의 권리에 관한 논의, 노예제를 비판한 글도 있다.

이 문서들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아프리카에 문자 기록이 없었다는 오래된 편견을 정면으로 반박하기 때문이다.

2012년 이슬람 무장 세력이 이 도시를 점령하고 성인 묘와 문서를 파괴했다. 도서관 직원과 주민들이 필사본 35만 점을 몰래 상자에 담아 배와 트럭으로 남쪽 바마코로 옮겼다. 대부분을 지켰다.

2016년 국제형사재판소가 문화유산 파괴를 전쟁범죄로 인정한 첫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이었다.

지도에서 보기: 11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니아니 대짐바브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