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투어 · 아무 곳이나 누르면 멈춤
지도에 표시
지도는 휠·더블클릭·드래그 · PgUp/PgDn은 스냅샷 이동
게이지를 Shift+드래그하면 10배 정밀 · 오른쪽 눈금은 인물·전쟁·사건이 있는 자리
틀린 데나 빠진 데를 알려주시면 확인하고 고칩니다.
이 브라우저에만 저장됩니다. 서버로 아무것도 보내지 않습니다.
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교황과 황제가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다퉜다. 성지 회복을 내건 원정이 시작되며 유럽이 처음으로 바깥을 향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호족 연합으로 선 왕조가 과거제와 관료제로 중앙집권을 다졌다. 거란·여진과 부딪히며 북방 경계를 지켰다.
왜인구 압력과 흘수 얕은 롱십이 결합했다. 강을 거슬러 내륙까지 들이닥칠 수 있는 배가 결정적이었다.
결과약탈로 시작해 정착과 건국으로 끝났다. 노르망디·러시아·아이슬란드가 이들의 손에서 생겼고, 북아메리카에도 콜럼버스보다 500년 먼저 닿았다.
궁정 여성으로 한자가 아니라 히라가나로 썼다. 남자들이 한문을 쓰는 동안 여성이 자기 말로 문학을 만들었다. 세계 최초의 장편소설로 꼽히기도 한다.
여러 종교를 알아본 끝에 비잔티움의 정교회를 택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선택으로 러시아가 서유럽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폴리스 쪽 문화권에 들어갔다.
귀주에서 거란의 10만 대군을 거의 전멸시켰다. 이후 백 년의 평화가 왔다.
실험으로 광학을 다시 쓰다
열여덟에 이미 이름난 의사였다. 그가 정리한 의학 백과가 유럽 의대에서 600년간 교과서로 쓰였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슬람 세계에 들여온 사람이기도 하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도시 · 1000 · 168명이 이긴 30분
안데스 고원의 온천 마을이자 잉카의 길이 지나는 곳. 아타우알파가 여기서 사로잡혔다
【그때 그 자리】 1532년 11월 16일이다. 피사로가 168명을 이끌고 안데스 고원의 카하마르카에 들어갔다.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는 근처 온천에 8만 명과 함께 있었다.
그해 형 우아스카르와의 내전을 막 이겼다. 승리 직후였다.
【왜 그렇게 됐나】 아타우알파가 그들을 위협으로 보지 않았다.
168명이다. 8만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호기심이 있었다. 낯선 짐승(말)과 물건을 가진 자들이 무엇인지 보려 했다.
잉카의 전쟁에는 절차가 있었다. 사절이 오가고, 날짜를 정하고, 진을 갖춘 뒤 싸웠다.
무기를 거의 들지 않고 광장으로 갔다. 가마를 탄 채였다.
【어떻게 흘렀나】 피사로는 광장을 둘러싼 건물에 사람과 말과 소형 대포를 숨겼다.
수도사 발베르데가 나가 성경을 내밀며 기독교와 에스파냐 왕에게 복종하라 했다.
아타우알파가 책을 받아 귀에 대 보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자 던졌다.
발베르데가 물러나며 외쳤다. 그것이 신호였다.
대포가 터지고 기병이 쏟아져 나왔다.
좁은 광장에 사람이 가득했다. 도망갈 곳이 없어 서로 밟혀 죽었다. 벽이 무너지며 그리로 몰려 나갔다.
가마꾼들이 팔이 잘려도 가마를 놓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에스파냐 쪽 사망자는 없었다. 피사로가 아타우알파를 붙잡다 손을 베인 것이 유일한 부상이었다.
【그래서】 왜 이렇게 됐는가.
말과 강철 갑옷과 화기를 처음 보았다. 그것이 컸다.
그러나 더 큰 것은 방식이었다. 협상하러 온 자리에서 기습당하는 형태의 전쟁을 겪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잉카가 고도로 중앙집권적이었다. 황제 한 사람이 잡히자 명령 체계가 멈췄다.
8만이 근처에 있었는데 움직이지 못했다.
아타우알파가 몸값을 제안했다. 방 하나를 금으로, 두 방을 은으로 채우겠다는 것이다.
제국 전역에서 금이 왔다. 신전 장식이 녹여졌다. 6톤이 넘는 금과 12톤의 은이 모였다.
다 받은 뒤 1533년 8월 그를 죽였다.
【남은 것】 정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빌카밤바에 잉카의 잔존 세력이 남아 1572년까지 40년을 버텼다.
그 금과 은이 유럽으로 갔다. 포토시 은광이 뒤에 열리며 세계의 은값이 흔들린다.
「168명이 1천만을 이겼다」는 이야기가 오래 인용됐다.
조건이 있었다. 내전 직후였고, 천연두가 먼저 인구를 줄였으며, 정복당한 부족들이 에스파냐 편에 섰다.
무엇보다 그날 광장에서 잉카는 싸울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