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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교황과 황제가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다퉜다. 성지 회복을 내건 원정이 시작되며 유럽이 처음으로 바깥을 향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호족 연합으로 선 왕조가 과거제와 관료제로 중앙집권을 다졌다. 거란·여진과 부딪히며 북방 경계를 지켰다.
왜에데사 백국이 함락되자 베르나르의 설교로 두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었다.
결과다마스쿠스 포위 나흘 만에 철수하며 완패했다. 이 실패가 무슬림 세력을 결집시켜 살라흐 앗 딘의 등장을 앞당겼다.
코르도바의 법관이자 의사이자 철학자. 그의 주석 덕에 유럽이 잊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다시 읽었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도시 · 1147 · 모스크바 대공국과 러시아의 중심
【그때 그 자리】
1147년 기록에 처음 나온다. 모스크바강 가의 작은 요새였다. 당시 루스의 중심은 키예프였다.
1237년 몽골이 들어왔다. 바투의 군대가 도시를 차례로 파괴했고 키예프가 무너졌다. 이후 240년간 루스의 여러 공국이 킵차크 칸국에 조공을 바쳤다.
【왜 그렇게 됐나】
모스크바가 커진 것은 이 지배 아래서였다.
모스크바 공들은 몽골에 협조했다. 다른 공국에서 조공을 걷어 바치는 역할을 맡았다. 이반 1세는 돈주머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걷는 과정에서 자기 몫을 챙겼고, 몽골의 힘을 빌려 경쟁 공국을 눌렀다.
1325년 정교회 수도 대주교좌를 모스크바로 옮겨 왔다. 종교적 권위까지 확보한 것이다.
위치도 나쁘지 않았다. 여러 강의 상류가 만나는 지점이라 수로가 이어졌고, 숲 안쪽이라 초원의 기병이 곧바로 닿기 어려웠다.
【어떻게 흘렀나】
1380년 쿨리코보에서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몽골군을 처음으로 이겼다. 곧 보복당했지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인 사건이었다.
1480년 이반 3세가 조공을 끊었다. 우그라강에서 양군이 대치하다 그냥 물러났다. 싸움 없이 끝난 이 사건을 러시아는 독립의 시점으로 본다.
이반 3세는 비잔티움 마지막 황제의 조카딸과 혼인하고 쌍두독수리 문장을 가져왔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라는 관념이 이때 만들어진다. 첫째 로마와 둘째 로마가 무너졌으니 셋째는 여기이고 넷째는 없다는 것이다.
1547년 이반 4세가 처음으로 차르를 칭했다. 카이사르에서 온 말이다. 그는 카잔과 아스트라한을 정복하고 시베리아 진출을 시작했다. 동시에 오프리치니나라는 친위 조직으로 귀족을 학살해 뇌제라 불린다. 성 바실리 대성당이 그의 카잔 정복을 기념해 지어졌다.
1712년 표트르 대제가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겼다. 200년간 옛 수도로 남았다.
1812년 나폴레옹이 들어왔다. 러시아군은 싸우지 않고 도시를 비웠고, 곧 대화재가 나 도시의 상당 부분이 탔다. 프랑스군은 겨울에 먹을 것도 잘 곳도 없이 물러났다.
【그래서】
1918년 볼셰비키가 수도를 다시 모스크바로 옮겼다. 독일군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크렘린이 소련의 중심이 됐다.
1941년 독일군이 시 외곽 30킬로미터까지 왔다가 겨울과 반격에 밀렸다.
【남은 것】
크렘린은 원래 요새라는 뜻의 보통명사다. 러시아 여러 도시에 크렘린이 있는데, 모스크바의 것이 권력의 대명사가 됐다.
제3의 로마라는 관념이 오래 남았다. 러시아가 자기를 정교회 세계의 보호자이자 서유럽과 다른 문명으로 여기는 자의식의 뿌리가 여기 있고, 그 자의식이 지금의 국제 정치에서도 언어로 등장한다.
작은 요새가 800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의 중심이 됐다. 그 출발이 정복이 아니라 정복자에게 세금을 걷어 바치는 일이었다는 점이 이 도시 역사의 특이한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