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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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억 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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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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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지질시대

기후

조산운동

생물과 공룡

대멸종

인류의 이동

그 해의 정치

암흑기 그리스

미케네 궁전 문명이 무너진 뒤 문자도 왕궁도 사라졌다. 작은 촌락 단위로 흩어져 살았고 이 시기의 기록은 거의 남지 않았다.

한반도

고조선

청동기를 바탕으로 선 한반도 최초의 국가. 연·한과 부딪히며 요동에서 서북부에 걸친 세력을 유지했다.

전쟁 1건

서주의 정벌과 견융의 침입BC 1042 – BC 771
주 vs 동이·회이·견융

봉건으로 나눠 준 제후들이 점차 왕실 말을 듣지 않았다. 서쪽 견융의 압박은 계속 커졌다.

동이 정벌호경 함락 BC 771

결과유왕이 견융에게 죽고 왕실이 동쪽 낙읍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주 왕은 이름만 남고 춘추시대가 시작된다.

271년 · 봉건 질서의 이완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2명

다윗정치BC 1000 · 목동에서 왕이 된 사람
BC 1010 – BC 970 재위

사울을 이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하나로 묶고 예루살렘을 도읍으로 삼았다. 시편의 상당수가 그의 것으로 전한다.

  • 열두 지파 통합과 예루살렘 천도
  • 골리앗 — 약자가 강자를 이긴 이야기의 원형
  • 밧세바 사건 — 성경이 왕의 죄도 적었다
조로아스터사상BC 1000 · 선악 이원의 종교를 세운 예언자
BC 1000년 무렵(추정)

빛의 신 아후라 마즈다와 어둠의 세력이 싸우고 마지막 심판이 온다는 가르침은 유대교·기독교·이슬람의 종말론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 「아베스타」의 가타 찬가
  • 선악 이원론과 최후 심판
  • 아케메네스·사산 페르시아의 국교로

그 무렵의 사건

BC 1000
다윗의 예루살렘
작은 산성 마을이 수도가 됐다.
다윗이 여부스족의 성을 빼앗아 도읍으로 삼았다. 남북 지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지였다는 점이 선택의 이유로 꼽힌다. 3,000년 뒤에도 같은 이유로 다투는 땅이 됐다.
BC 1000
고조선이 모습을 드러내다
「삼국유사」는 단군의 건국을 BC 2333년으로 적었다. 고고학으로 실체가 잡히는 것은 비파형동검이 나오는 BC 10세기 무렵이다. 지도는 유물이 말하는 쪽을 따라 그렸다.
flag
BC 1000
노크 문화
사하라 이남에서 가장 이른 철.
나이지리아 중부에서 실물 크기에 가까운 테라코타 두상이 나온다. 눈이 삼각형이고 표정이 뚜렷하다. 같은 층에서 제철 유적이 나와, 이 지역이 청동을 건너뛰고 철로 갔음을 보여 준다.
BC 1046
목야 전투
천명이 옮겨간다는 논리가 태어났다.
주 무왕이 상 주왕을 쳤다. 주는 「하늘이 덕 없는 왕에게서 명을 거둬 갔다」는 천명 사상으로 왕조 교체를 정당화했고, 이 논리가 이후 3,000년 동아시아 정치의 문법이 된다.
BC 1050
페니키아 알파벳
서기관의 독점이 22자로 깨졌다.
쐐기문자는 수백 자, 상형문자도 수백 자였다. 페니키아인은 자음 22자로 줄였고, 상인이라면 며칠이면 배웠다. 그리스인이 여기에 모음을 더해 오늘날 우리가 쓰는 알파벳이 됐다.

교역로

해당 없음

왕검성

도시 · BC 1000 · 대동강가에 있던 고조선의 도읍. BC 108년 한 무제에게 함락됐다

【그때 그 자리】

고조선의 수도로 기록된 곳이다. 삼국유사와 사기에 왕험성 또는 왕검성으로 나온다.

위치를 두고 논쟁이 오래됐다. 평양 대동강 유역으로 보는 것이 학계 다수설이고, 요령의 랴오허 유역으로 보는 설과 처음에는 요령에 있다가 평양으로 옮겼다는 설이 함께 있다.

이 논쟁이 풀리지 않는 이유가 있다. 고조선 자체의 기록이 남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것은 중국 문헌과 발굴 자료뿐이다.

【왜 그렇게 됐나】

기원전 194년 연에서 온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됐다. 위만은 상투를 틀고 조선옷을 입고 왔다고 기록됐다. 조선 계통 사람이 연 지역에 살다 돌아온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위만 이후 고조선은 철기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세력을 넓혔다. 그리고 중계 무역을 독점했다. 한반도 남쪽의 진이 한과 직접 통하는 것을 막고 이익을 챙겼다.

왕검성은 이 무역의 중심이었다. 부가 여기 모였다.

【어떻게 흘렀나】

그 부가 화근이 됐다. 기원전 109년 한 무제가 침공했다.

양복의 수군 5만이 산둥에서 바다를 건너고 순체의 육군이 요동에서 왔다. 고조선은 1년을 버텼다. 수군이 먼저 도착해 성급히 쳤다가 크게 졌고, 육군도 패수에서 막혔다.

한의 두 장수가 서로 공을 다투며 협조하지 않았다. 화친 협상 중에 서로 다른 말을 했다. 나중에 순체는 처형되고 양복은 서인이 됐다.

성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열렸다. 대신들이 항복을 주장하다 한으로 넘어갔고, 기원전 108년 니계상 참이 사람을 보내 우거왕을 죽였다. 대신 성기가 계속 저항하자 왕자 장과 다른 이의 아들이 성기를 죽였다.

【그래서】

한이 낙랑을 비롯한 군현을 두었다. 낙랑은 313년까지 400년 넘게 이어지며 중국 문물이 한반도로 들어오는 창구가 됐다.

평양 일대에서 낙랑 시기의 무덤이 2천 기 넘게 발굴됐다. 칠기와 청동거울과 금제 허리띠 장식이 나왔다. 낙랑예관이라 새겨진 기와도 나왔다.

【남은 것】

왕검성의 자리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평양 대성산성 일대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그 자리에는 뒷날 고구려의 성이 겹쳐 있다.

이 문제가 뜨거운 이유는 식민사학과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일제가 낙랑군을 강조해 한국사가 처음부터 외부 지배로 시작했다고 서술한 역사가 있다. 그 반작용으로 낙랑의 평양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주장도 나왔다.

둘 다 조심할 필요가 있다. 낙랑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과, 한국사가 그것으로 규정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고조선은 한이 오기 전에 이미 수백 년을 존재했고, 1년을 버텼으며, 안에서 갈라져 무너졌다.

왕검이라는 이름 자체가 흥미롭다. 단군왕검의 왕검과 같다. 학계 다수는 이를 특정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제사장이자 정치 지도자를 뜻하는 칭호로 본다. 그렇다면 왕검성은 그 사람이 있는 성이라는 뜻이 된다.

지도에서 보기: BC 1000년의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