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투어 · 아무 곳이나 누르면 멈춤
지도에 표시
지도는 휠·더블클릭·드래그 · PgUp/PgDn은 스냅샷 이동
게이지를 Shift+드래그하면 10배 정밀 · 오른쪽 눈금은 인물·전쟁·사건이 있는 자리
틀린 데나 빠진 데를 알려주시면 확인하고 고칩니다.
이 브라우저에만 저장됩니다. 서버로 아무것도 보내지 않습니다.
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서쪽에는 프랑크·서고트·동고트 왕국이 들어섰고 동쪽 로마만 제국으로 남았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옛 영토를 되찾으려 했지만 역병과 재정 파탄이 뒤따랐다.
고구려가 낙랑을 몰아내고 남하했다. 광개토대왕·장수왕 대에 최전성기를 맞았고 백제와 신라가 동맹으로 맞섰다.
왜유스티니아누스는 제국을 옛 경계로 되돌리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반달·동고트 왕국의 내분이 개입의 빌미가 됐다.
결과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되찾았지만 20년 전쟁과 역병으로 국력만 소진했다.
로마법을 집대성하고 하기아 소피아를 세웠다. 옛 영토를 되찾으려다 국력을 소진했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도시 · 538 · 나당연합군에 함락됐다
【그때 그 자리】
475년 한성이 함락된 뒤 백제는 웅진, 지금의 공주로 옮겼다. 급히 쫓겨 간 곳이라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에는 좋았지만 좁았다.
웅진 시절 64년 동안 왕이 신하에게 살해되는 일이 잇따랐다. 문주왕과 동성왕이 그렇게 죽었다. 왕권이 약하고 귀족이 강했다.
무령왕이 이를 수습했다. 지방에 왕족을 보내 다스리게 하고 중국 남조와 다시 통했다. 1971년 발견된 무령왕릉이 그 시대를 보여준다. 도굴되지 않은 채 나왔고, 무덤 주인을 밝히는 지석이 함께 있었다.
【왜 그렇게 됐나】
538년 성왕이 사비, 지금의 부여로 옮겼다. 이번에는 쫓겨 간 것이 아니라 계획한 천도였다.
백마강이 감싸 돌아 방어에 유리하면서 주변에 평야가 넓다. 바다로 나가기도 좋다.
국호를 남부여로 고쳤다. 부여를 잇는다는 선언이다. 고구려에 밀려 내려온 나라가 자기 뿌리를 다시 말한 것이다.
【어떻게 흘렀나】
사비는 계획도시였다. 나성이라는 외곽 성벽이 도시를 감쌌고, 안을 다섯 부로 나누고 각 부를 다시 다섯 항으로 나눴다. 중앙 관청을 22부로 정비했다.
이 시기 백제 문화가 절정에 닿았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이 남아 있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유물로, 비례가 정교하다. 백제 석탑의 원형으로 꼽힌다.
1993년 능산리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나왔다. 높이 62센티미터에 봉황과 용과 다섯 악사와 산과 짐승 100여 마리가 새겨져 있다. 진흙 웅덩이에 묻혀 1,400년을 견뎠다. 나당 연합군이 올 때 급히 감춘 것으로 보인다.
일본과의 교류가 이 시기에 가장 활발했다. 538년 성왕이 불교를 전했고, 기술자와 학자가 건너갔다. 일본 최초의 본격 사찰 아스카데라를 백제 기술자가 지었다.
【그래서】
660년 나당 연합군이 왔다. 소정방의 13만이 금강으로 들어오고 김유신이 탄현을 넘었다. 계백이 황산벌에서 막았으나 무너졌다.
사비성은 열흘 만에 떨어졌다. 의자왕은 웅진으로 피했다가 항복했고 당으로 끌려가 그해 죽었다.
【남은 것】
낙화암에서 삼천 궁녀가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조선 시대 문학에서 나온 것이다. 당대 기록에는 없고, 사비의 인구 규모로 볼 때 성립하기 어렵다.
망한 나라를 방탕함으로 설명하는 방식은 승자와 후대의 붓에서 자주 나온다. 금동대향로와 정림사지 석탑과 무령왕릉이 보여주는 것은 그 설명과 전혀 다른 수준의 나라다.
2015년 공주와 부여와 익산의 백제 유적이 묶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됐다.
부여는 지금 인구 6만의 작은 군이다. 122년간 한 나라의 수도였던 자리다.
지도에서 보기: 500년의 세계